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서소문 포럼] 재벌 3세 경영자들, 국민연금과 손을 잡아라

중앙일보

입력 2017.01.20 00:21

수정 2017.01.20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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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기
신문제작담당
경제연구소장

재벌 오너 가문에 경영권 승계는 험난한 여정이다. 합법과 불법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기 일쑤다. 해외 기업사냥꾼의 공격이 무서워 자사주 매입 등에 엄청난 비용을 치르기도 한다. 그동안 주요 재벌은 악어가 우글거리는 강을 건너는 물소의 심정이었을 법하다. 그렇게 3세들은 속속 강을 건너 기업 경영의 전면에 등장했다. 한국 경제의 큰 변화상이다.

하지만 강 건너편이 낙원은 아니다. 도처에 맹수가 어슬렁거린다. 3세 경영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초리가 곱지 않다. 대선주자들은 너도나도 ‘재벌개혁’을 공약한다. 보수가 됐든 진보가 됐든 새 정부에서 재벌개혁 정책은 불가피한 수순이다.

국민연금 등 기관 주주에 사외이사 추천 의뢰를
일자리 창출도 손에 잡히는 수치로 제시했으면

재벌을 해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경제의 주춧돌이다. 청년들이 취업하고 싶어 하는 좋은 일터다. 그럼에도 국민은 변화를 주문하는 회초리를 든다. 오너 가문이 소수 지분으로 황제 경영을 일삼지 못하게 지배구조를 바꾸라고 한다. 쌓아놓은 현금을 투자로 돌려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납품업체들과 상생하는 길을 찾아 달라고 주문한다.

재벌 3세 경영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피하기 힘들다면 스스로 변하는 게 상책이다. 피해갈 구멍만 찾다가는 더 큰 매를 부를 수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 앞의 글로벌 기업들을 보자. 황당한 팔꺾기에도 잇따라 굴복해 미국 안에 수천~수만 개씩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있지 않은가.

먼저 국민연금과 손을 잡아 보라고 제안한다. 사외이사 한 자리를 과감히 내놓고 추천해 달라고 의뢰하는 방식이다. 재벌 계열사 중 상당수는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다. 투자한도 10%를 거의 꽉 채워 오너 가문보다 지분율이 높은 경우가 허다하다. 국민연금은 온 국민의 돈이다. 더구나 10% 지분의 주주라면 응분의 대접을 해주는 게 맞다.


그래 봐야 이사회 멤버 5~10명 중 한 자리다. 의사결정을 뒤집기는 역부족이다. 국민연금 추천 사외이사 모시기는 일반 주주들을 존중해 투명하게 경영을 할 테니 직접 눈뜨고 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물론 전제는 있다.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이 독립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는 최순실 사태 이후 빅이슈로 떠오른 만큼 새 정부가 해결할 것으로 기대해 보자.

국민연금도 재벌 계열사에 사외이사를 보낼 채비를 했으면 한다. 기업과 금융회사의 전직 최고경영자(CEO)를 중심으로 철저히 사전 검증된 사외이사 추천 풀을 만들어 공개하는 것이다. 이런 인물들 중에서만 사외이사를 추천한다면 정치권 낙하산을 봉쇄할 수 있다. 또 복수 추천해 기업이 한 명을 고르게 선택권을 주며, 이런 과정을 다른 기관투자가들과 연합해 추진하면 더욱 바람직하다.

다음으론 국민의 마음을 사야 한다.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첩경이다. 이제 사내유보 현금을 적극 풀어 투자로 돌릴 때가 됐다. 인공지능과 로봇 등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투자가 아니고선 살아남기 힘들다. 그러나 투자가 곧 일자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국민은 안다. 구체적으로 어디에 얼마를 투자해 일자리를 몇 개 만들겠다고 약속해야 통한다. 요즘 글로벌 기업들이 트럼프에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납품 중소기업들과 상생하는 방안이다.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갑질과 골목상권 침투를 재벌 총수들이 직접 지시하진 않을 것이다. 개별 사업단위별 중간 간부들이 실적을 높여 조직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다 보니 그런 일들이 생긴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오너 경영자가 책임을 면하긴 힘들다. 지나친 단기 성과주의를 채택한 게 조직을 그렇게 몰고 가기 때문이다.

단가 후려치기로 납품업체의 경쟁력이 떨어지면 결국 부메랑이 돼 대기업 완제품에도 결함이 생기게 된다. 중간 간부들이 단기 업적에 쫓기지 않고 길게 보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평가시스템을 바꿔 보자.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듯이 기업도 사회적 존재로 봐야 한다.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면 오래 생존하기 힘들어진다. 주주와 종업원, 납품업체 등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게 바로 3세 경영자들이 성공하는 길이다.

김광기 신문제작담당·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