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종종 만나는 ‘진한 피’란 주제의 스토리텔링이다.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Who do you think you are)’란 BBC프로그램도 있다. 일종의 조상 찾기, 즉 보학(譜學)이다.
사실 멋쩍은 얘기일 수 있다. 우린 모두 수십만 년 전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주한 현생인류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서로 아는 사람이듯,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공통의 선조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런 유의 얘기에 빠져드는 건 영국 사회를 이해하는 직관을 주곤 해서다. 런던 동부 지역인 이스트엔드 출신 배우의 사연이 그랬다. 이스트엔드는 대표적 노동계급 거주지로 그의 계급도 그랬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이 꽃 파는 여인으로 나와 구사한 알아들을 수 없는 하층민 영어(코크니 잉글리시)가 그의 ‘모국어’다. 모계는 누대에 걸쳐 빈민원을 들락날락했다. 하지만 그 역시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었다. 찰스 1세의 참수로 끝난 17세기 내전이 가문의 운명을 갈랐는데 왕당파였던 선조는 그때 무산계급으로 떨어졌다. 그러곤 300년간 바닥을 맴돌았다. 무려 300년이다.
리버풀 출신 배우의 부계는 내내 부두 노동자였다. 사고로 요절한 짐마차꾼-사고로 요절한 짐마차꾼-사고로 요절한 짐마차꾼인 식이다.
영국은 본질적으론 계급 사회다. 언어도 삶의 방식도 다르다. 기회가 다르니 성취도 다르다. 수백 년간 유지돼온 골간이다. 요즘도 최고의 드라마 스쿨이 이튼 칼리지란 농반진반의 주장이 나올 정도다. 여기 사람들은 나름 사는 듯한데, 한국인들은 “어떻게 참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두르곤 한다.
우리도 계급이 생기고 있다는 관측이다. 근래의 기막힌 일들을 보면 이미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이곳까지도 또렷하게 들리는 공정·평등에의 요구는 어쩌면 그걸 늦추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어야 되겠나.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