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노트북을 열며] 책, 그 오래된 미래

중앙일보

입력 2017.01.04 00:27

수정 2017.01.04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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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
문화부 차장

지난해 한국을 찾은 넷플릭스 CEO 리드 헤이스팅스는 TV와 책을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귀가 솔깃할 얘기를 했다. TV 시리즈를 매주 한 편씩 공개하는 대신 전편을 한꺼번에 공개하는 넷플릭스의 방식, 그래서 몰아보든 골라보든 이용자 마음대로인 방식의 원형이 ‘책’이란 거였다.

그는 “책은 내가 원하는 때 내 마음대로 읽지 않느냐”며 이를 “콘텐트를 즐기는 오리지널 방식”이라고 했다. 이용자의 시청 습관을 크게 바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혁신이 그보다 한참 오랜 매체를 본뜬 셈이다.

물론 책 자체도 조금씩 달라진다. 최근 새로운 독서 체험을 했다. ‘퍼블리’라는 스타트업이 운영하는 지식콘텐트 사이트에서 온라인 보고서 한 편을 사서 읽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다녀와 글로벌 출판업계의 동향을 전하는 내용인데 그 형식이 여러모로 기존 책과 달랐다. 동영상을 삽입하고 관련 자료의 링크를 하이퍼텍스트로 곁들인 것은 책보다 블로그를 닮았다. 각 장의 분량을 쪽수 대신 읽는 데 소요될 예상 시간으로 표시한 것은 신선했다. 내가 읽는 데 걸린 실제 시간을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사이트에는 각종 분석을 위한 데이터로 기록될 터였다.

발간 과정도 색다르다. 콘텐트를 만들기 전에 미리 주제를 공개하고 구매자를 모은다. 크라우드 펀딩이자 주문형 출판인 셈이다. 이 스타트업의 대표와 몇 달 전 잠시 인사를 나눴다. 공개 포럼에서 그가 발표한 내용이 흥미로워 다가가서 이것저것 물었다. 경영학을 전공해 이름난 컨설팅회사에서 일했던 경력보다 그 자신이 책을 퍽 좋아하고 많이 읽는 사람이란 인상이 기억에 남았다.


디지털과 온라인은 다른 모든 분야처럼 책과 출판시장을 바꿔놓고 있다. 한데 그 파장이 일방향만은 아니다. 일례로 아마존의 킨들이 불붙인 전자책의 세계적 성장세는 최근 들어 주춤하는 상태다. 달리 말해 종이책을 대체하는 대신 서로 안정적인 지분을 공유하는 상황이다.

이번에 읽은 보고서에서도 그 같은 대목과 더불어 미국의 독립서점이 다시 늘고 있다는 수치가 눈에 들어왔다. 국내에서도 저마다 취향과 주제에 맞춰 공간을 꾸미고 책을 선별해 판매하는 새로운 동네서점의 등장이 뚜렷한 문화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서점에 들어서면 책 더미에서 무심히 지나치던 한 권 한 권이 특별해 보이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래서 좀 더 낙관적인 전망을 전개해 보려는 순간, 국내 2위의 서적 도매상이 부도를 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불현듯 IMF 외환위기 직후가 떠오른다. 그때는 굵직한 도매상이 여럿 부도를 내 출판사들이 연달아 어려움을 겪었다. 너나없이 경기가 어렵다는데 출판업계라고 예외는 아닐 테지만 얼마 전까지 ‘문화융성’이 구호처럼 울려 퍼졌던 터라 헛헛함이 크다. 익숙하고 오랜 것이 때때로 가장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정부의 문화진흥책이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이다.

이후남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