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처음과 끝에 스타일리스트가 있다
‘패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직업이 디자이너다. 가장 근본적인 일, 옷을 짓는 창작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만큼 패션계를 좌지우지하는 숨은 손이 있다. 스타일리스트다. 대중에게는 유명인·연예인에게 옷을 입혀주는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의 활동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패션쇼부터 디자인 협업이나 드라마·영화·광고까지, 패션이 존재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 그들의 손길이 닿는다.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국내에 도입된 지 불과 20여 년 만에 달라진 위상이다. 패션계 ‘제2 창작자’로 자리 잡은 스타일리스트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디자이너에게 ‘쓴 소리’ 할 수 있는 패션쇼 파트너
국내 패션계 역시 크리에이터로서 스타일리스트의 입지와 영향력은 점차 넓어지는 중이다. 볼코바처럼 디자이너와 함께 짝을 이뤄 패션쇼를 기획하는 일도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채한석 스타일리스트와 ‘오디너리 피플’ ‘프리 마돈나’, 김예영 스타일리스트와 ‘스티브제이 앤 요니피’처럼 특정 스타일리스트와 컬렉션을 함께 준비하는 게 젊은 디자이너 브랜드에서는 대세가 되고 있다. 스타일리스트의 역할 정도는 다르지만 패션쇼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해당 시즌의 테마를 정하면 어떤 소재를 쓸지, 주요 디테일은 무엇으로 할지, 스타일링의 조합은 어떻게 할지에 대해 디자이너와 의견을 나누는 것은 물론, 실제 옷이 만들어진 뒤엔 보다 구체적인 맥을 잡아 나간다. 가령 ‘전체적으로 드레스가 부족하다’ ‘프린트가 컨셉트와 맞지 않는다’ ‘이런 액세서리는 빼는 게 좋다’ 등의 뼈아픈(?) 조언을 서슴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선 모델 캐스팅 권한이 주어지기도 한다. 지난 두 시즌에 걸쳐 정미선 디자이너(노케)의 패션쇼 작업을 한 송선민 스타일리스트는 “스팽글 톱 하나를 놓고 쇼에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 디자이너와 실랑이를 벌였다”면서 “노숙해 보이는 아이템이 전체 분위기와 맞지 않아 결국 미니 랩스커트를 짝짓는 것으로 해법을 찾았다”고 경험을 털어놨다.
‘자식 같이 아끼는’ 옷을 이처럼 냉혹하게 평가하는 스타일리스트를 굳이 디자이너들이 필요로 하는 이유는 뭘까. 자뎅 드 슈에뜨의 김재현 디자이너는 “옷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쇼의 성공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가령 10여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대에 등장하는 수십 벌의 실루엣이 얼마나 일관성을 가질지, 첫 번째 착장과 마지막 착장은 무엇으로 선택할지, 헤어스타일과 화장은 어떤 분위기로 할지, 이들 하나하나에 따라 무대의 완성도는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때로는 무대 효과, 보도자료, 음악 등 쇼 전반을 하나의 스타일로 만들어내는 역할도 한다. 그는 “디테일 하나하나에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디자이너에게는 컬렉션이라는 콘텐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스타일리스트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브랜드와 협업하고 패션 전시 큐레이팅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스타일리스트가 디자인에 참여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나고 있다. 한혜연 스타일리스트는 올해 플락진·로브로브서울·앳지A+G 등 국내 온·오프 브랜드와 협업한 아이템들을 선보였다. 플락진의 자수 청바지의 경우 100벌 한정 제품이었는데 곧바로 완판을 기록하면서 화제가 됐다. 김윤미 스타일리스트는 지난해 모델 송경아와 함께 디자인 그룹 ‘더 라벨’을 만들고 시즌별로 한 아이템을 집중해 내놓고 있다. 첫 프로젝트에서는 트렌치코트를 주제로 잡고 야상 스타일, 실크 소재, 양가죽 라펠 장식 등을 특징으로 한 트렌치코트를 선보였고, 이번 겨울에는 코트가 주제였다. 지난해 10월 지드래곤이 선보인 브랜드 ‘피스마이너스원’ 역시 그가 속한 그룹 빅뱅의 스타일리스트 지은 YG이사가 협업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이외에도 국내에서 아직 전문화되지 못한 자리를 스타일리스트가 대체하기도 한다. 서영희 스타일리스트가 대표적인 예. 지난 2~3년 간 국내외에서 진행된 굵직한 패션 전시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2015년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파리 국립장식미술관에서 열린 한복 패션전, 지난해 패션지 보그가 주최한 한국패션 100년전, 지난 서울패션위크 기간 중 마련된 디자이너 한혜자 회고전 등이 모두 서씨의 손길을 거쳤다. 복식 아카이브를 정리하고 테마를 구성하는 패션 큐레이터가 전무한 국내 상황에서 스타일리스트 1세대인 서씨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미술계는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림’을 초라하지 않게 만들 수는 있다는 학습효과 덕에 하나둘씩 작업을 하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한국패션 100년전’을 준비할 때 주최 측은 ‘1950년대 국내 디자이너의 옷들이 너무 초라해서 걱정’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서씨는 빈티지풍의 커다란 나무 박스를 새로 짜고 그 안에 옷을 전시해 마치 귀한 유산을 꺼내는 듯한 이미지를 구현했다.
편집·재구성으로 새로운 스타일 창출
스타일리스트의 영향력이 이처럼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트렌드 분석기관 ‘트렌드 506’의 이정민 대표는 “새로운 물건,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대접받는 ‘신상 효과’가 사라졌다”는 데서 원인을 찾았다. 이는 비단 패션만이 아니라 출판·미술·음악 등 거의 모든 문화·예술분야에서 기존의 소스를 편집하고 재구성하는 ‘큐레이팅’에 주목하는 흐름과 맥락을 함께한다. 그래서 대중의 관심은 어떤 새 옷을 입느냐보다, 이를 어떻게 입느냐에 쏠릴 수밖에 없다. 이는 변화된 소비 행태와도 일맥상통한다. 패션홍보대행사 ‘케이앤컴퍼니’ 김민정 이사는 “예전엔 연예인이 입은 옷을 보고 ‘저걸 사야지’ 했다면 이제는 ‘저런 분위기나 스타일로 입어야지’라는 식으로 대중의 욕망이 달라지고 있다”고 변화를 설명한다.
한편으로는 트렌드 형성 과정이 달라진 것을 이유로 꼽기도 한다. 럭셔리 패션하우스가 일방적으로 제시하면 유행이 되는 게 아니라, 스트리트 패션 감성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 그래서 하이엔드와 스트리트, 그 중간에서 유행을 만들고 조율하는 스타일리스트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가령 셔츠 끝단을 바지 속에 넣고 한 쪽만 빼서 입는 베트멍 식 스타일링은 누구나 따라 하기 쉬운 스트리트 감성을 반영한 것이다.
지난 연말 패션 온라인 매체 비즈니스 오브 패션은 패션계의 첫 번째 유망 직종으로 스타일리스트를 꼽았다. 디자이너와 브랜드는 물론 문화예술 전반에서 폭넓은 인맥과 경험을 갖춘 이들의 소통 능력이 더욱 요긴해졌다는 이유에서다. 패션지 편집장 출신의 강주연 JTBC플러스 본부장(엔터트렌드채널) 역시 “스타일리스트의 자질도 이제는 단지 옷만이 아니라 공간과 음악,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하는 때”라고 말했다. 스타일리스트가 스타일링 하는 패션계, 그 새로운 장면이 지금 연출되고 있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