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정당 분열사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보수정당에서 처음으로 조직적인 분열이 발생한 건 95년 민자당에서 김종필(JP) 당시 대표최고위원이 탈당해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민련을 창당했을 때였다. 자민련은 그해 6월 치러진 제1회 전국지방선거에서 대전시장, 충남·충북·강원 지사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인제, 경선 불복 후 국민신당 창당
보수 후보 분열로 DJ 당선에 영향
MB 당선 후 총선 때 친박계 공천학살
박근혜 “꼭 살아서 돌아오라” 격려
낙천자들 ‘친박연대’ 꾸려 대거 당선
학계 “비박계의 ‘개혁보수신당’은
보수 분열 아닌 새누리 해체 과정”
2002년 2월에도 16대 대선 정국을 맞아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 이회창 총재의 독주에 반기를 들고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일이 있다. 하지만 한국미래연합은 사실상 ‘박근혜 1인 정당’이었기 때문에 조직적 분열로 보기는 어렵다. 그나마 한국미래연합은 그해 6월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자생력을 상실했고, 결국 박 의원은 그해 11월 한나라당과의 합당 형식으로 다시 복당했다.
하지만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사활을 건 전쟁을 벌였던 친이계와 친박계는 쉽게 융화하지 못했다.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 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는 또다시 정면으로 충돌했고 친이계와 친박계 간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가 후반으로 접어들고, 한나라당이 2011년 10월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친이계는 급속히 쇠퇴하고 당내 권력구도는 박 전 대표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2012년 총선 때 당권을 거머쥔 박 전 대표 측은 친이계를 대거 잘라내고 당의 친박 색깔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당시에는 새누리당 전체가 코너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친이계가 집단적 반발을 하지 못했다.
현재 새누리당 비주류 의원들이 추진하고 있는 가칭 ‘개혁보수신당’ 창당은 87년 개헌 이후 보수 정당의 네 번째 조직적 분열이다. 과거 자민련·국민신당·친박연대는 선거에 대비해 급조한 정당의 성격이 강했다. 반면 ‘개혁보수신당’은 창당과 동시에 원내교섭단체가 된다는 점에서 앞서 세 번의 분열에 비해 영향력이 훨씬 크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엔 찬성하면서 재벌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노선이다.
정병국 개혁보수신당 창당준비위원장은 “새누리당은 보수를 대변한다면서 박 대통령의 사당(私黨)이 됐고, 친박은 패권주의로 최순실 국정 농단을 방조해 도덕성과 보수 기반을 통째로 잃었다”고 비판했다.
2004년 이후 새누리당(전신 한나라당 포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박근혜 시대’의 종말이란 해석도 있다. 장훈 중앙대(정치외교학) 교수는 “개혁보수신당의 등장은 보수정당의 분열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수명이 다한 당이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지난 10년간 집권했던 새누리당의 힘은 이제 다했고, 새누리당에 남아 있는 친박도 오래지 않아 힘이 빠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 탄핵으로 차기 대선이 확 앞당겨질 가능성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보수정당의 분열이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97년 대선 때는 보수정당의 분열로 진보정당이 반사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보 진영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된 상태라 경우의 수가 복잡해졌다. 개혁보수신당의 최대 약점은 유력 대선주자가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아직 시나리오 수준이지만 신당이 국민의당과 연대해 제3 지대를 형성하는 그림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대선 직전에 특정 후보를 고리로 새누리당과 재결합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사상 첫 보수정당의 분당 사태는 탄핵 사태와 겹치면서 대선 정국을 더욱 요동치게 하고 있다.
[S BOX] 역대 대통령들 집권말기 줄줄이 탈당, MB만 당적 유지한 채 퇴임
새누리당 윤리위원회는 지난 12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징계수위를 논의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사흘 만에 열린 윤리위원회에서 7명의 위원은 ‘탈당 권유’로 의견을 모았다. 징계수위를 최종 발표하기 전인 13일 이진곤 전 윤리위원장은 “우리가 탈당을 권유하는 것보다 대통령이 스스로 당적을 정리하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정치사에서 정당의 오너였던 대통령이 집권 말기에 당에서 쫓겨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4대 대선 직전인 1992년 야권의 선거중립 요구가 거세지자 그해 10월에 공식 탈당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차남 현철씨의 비리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다가 15대 대선 직전인 97년 11월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대선후보와의 갈등이 결정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최규선 게이트 등 세 아들의 비리 의혹이 잇따라 불거지자 2002년 5월 대국민 사과를 한 뒤 자신이 만든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7년 2월 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당적을 정리했다. 임기 말 지지율이 바닥을 쳐 차기 대선에 부담이 된다는 여론 때문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88년 11월 5공 청문회를 겪고 민정당을 탈당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여당 당적을 유지한 채 퇴임한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우리 정치사에서 정당의 오너였던 대통령이 집권 말기에 당에서 쫓겨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4대 대선 직전인 1992년 야권의 선거중립 요구가 거세지자 그해 10월에 공식 탈당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차남 현철씨의 비리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다가 15대 대선 직전인 97년 11월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대선후보와의 갈등이 결정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최규선 게이트 등 세 아들의 비리 의혹이 잇따라 불거지자 2002년 5월 대국민 사과를 한 뒤 자신이 만든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7년 2월 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당적을 정리했다. 임기 말 지지율이 바닥을 쳐 차기 대선에 부담이 된다는 여론 때문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88년 11월 5공 청문회를 겪고 민정당을 탈당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여당 당적을 유지한 채 퇴임한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채윤경 기자 pcha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