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꽃길만 걸어온 이처럼 보인다. 입단 1년 만에 여주인공까지 꿰찼으니 누구든 부러워 할 만하다. 이만큼 급성장한 데엔 본인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좋은 배경도 있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집안의 전폭적 지원이나 최상의 학습 여건, 우월한 신체비율 등등. ‘귀족예술’이라 불리는 발레니 감히 ‘흙수저’가 넘볼 수 있겠느냐 말이다. 하지만 그의 성장 과정은 정반대다. 가난과 불우한 가정환경, 단신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뚫고 일궈낸 기적의 드라마다.
‘호두까기 인형’ 여주인공 김희선
4만원짜리 토슈즈 비용 아끼려
접착제 발라가며 뭉개질 때까지 신어
악착같은 연습으로 신체조건 극복
2인무에 강점, 국제콩쿠르 1위도
“어떤 무용수에도 없는 간절함 있어”
어린 희선은 재능이 있었다. 초등부 대회에 나가면 매번 상을 탔다. 무엇보다 끼가 넘쳤다. 하지만 발레란 거저 하는 게 아니었다. 특히 4만원짜리 토슈즈 비용이 많이 들었다. 일주일이면 앞부분이 물러져, 새것으로 바꿔야 했다. 그걸 희선은 3주씩 신었다. 강력접착제를 발라가며 어떡하든 길게 신으려 했지만, 툭하면 삐거나 접질리며 발목 부상을 달고 살았다. “토슈즈 사달라는 얘기 꺼내기가 가장 싫었어요. 그때마다 엄마는 ‘좀 아껴쓰지’하고, 그러면 난 또 짜증내고….”
집은 경기도 의정부였다. 선화예중까진 1시간40분 걸렸다. 아침 6시에 일어났지만 툭하면 지각이었다. 집에 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친구들과 어울릴 여유는 없었다. 악바리처럼 연습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자라지 않는 키는 야속했다. 그는 현재 국립발레단 최단신(156㎝)이다. 체구가 작은 만큼 존재감은 약해졌고, 센터에 서지 못한 채 외곽으로 물러나야 했다. “신체 조건은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기를 쓰고 테크닉에 더 몰입했죠.”
작은 키는 약점만 되진 않았다. 파드되(2인무)를 하는 데 유리했다. 남성 무용수들이 사뿐히 들 수 있는 희선과 함께 하는 걸 좋아했다. 한예종 진학 후 그가 처음 국제콩쿠르에서 1등을 했던 부문도 파드되였다. 자신만을 돋보이게 하는 것보다 주변을 챙기는 성품과도 잘 맞았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1970년대 루돌프 누레예프의 파트너로 세계를 호령한 모리시타 요코 역시 150㎝의 단신이었다. 민첩했고 작은 동작에 강했다. 김희선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평했다. 희선의 스승이었던 한예종 조주현 교수는 “어떤 무용수에게도 없던 간절함이 희선에겐 있었다. 그건 감동이었다”고 전했다.
희선은 현재 가장이나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4년 전 큰 교통사고를 당해 지금껏 후유증에 시달려 왔다. 희선은 국립발레단에 들어와 돈도 벌지만 무엇보다 “토슈즈를 맘껏 신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이번 깜짝 발탁에 대해 강수진 예술감독은 “김희선은 클래식·모던 두 장르 모두 소화해 낼 줄 안다.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희선의 무대는 20일이다. 어머니 정지연(45)씨는 “너무 귀한 성탄 선물이지만 눈 뜨고 제대로 볼 수 있을지, 내가 너무 떨린다”고 말했다.
글=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