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기이긴 하지만 분명히 발전된 모습이다. 막연한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권리가 무대의 중심에 섰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이기는 당사자는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거나 다짜고짜 우는 사람이 아니다. 빼도 박도 못할 계약서 조항을 들이미는 사람이 제일 강하다. 권리를 가진 자는 그걸 당당하게 주장하면 된다. 은혜를 베풀 것을 호소할 필요도 없고 힘으로 윽박지를 필요도 없다.
그동안 사람들이 헌법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법이란 그게 뭐든 학생들이 따라야 하는 교칙처럼 저 위의 누군가가 자신을 규율하는 갑갑한 구속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번 검색창에 ‘헌법’을 친 후 읽어보시라. 앞부분에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한참 나열한 후에 혹시라도 빠뜨렸을까 봐 ‘이 밖에도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고 마무리한다. 뒷부분에는 국민이 시키는 일을 맡아 할 이들을 어떻게 고용하고 이들과의 계약 기간은 몇 년이며, 이들이 지켜야 할 의무는 무엇 무엇이고 엉터리일 때에는 어떻게 해고하고 등등이 시시콜콜하게 적혀 있다.
집주인과 임대차계약서, 업주와 ‘알바’ 계약서, 대기업과 납품계약서를 써 본 분들은 바로 아실 것이다. 헌법이라는 계약서의 갑(甲)은, 국민이다.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