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왕|백승화|심은경, 박주희|10월 20일 개봉
한국영화·TV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 '케미' 분석
‘걷기왕’은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가는 만복의 유쾌한 성장기인 동시에, 만복과 수지의 ‘워맨스(우먼(Woman)과 로맨스(Romance)를 합친 신조어)’를 다룬 드라마다. 극 중에서 수지는 “다 정신력 문제야. 못하는 게 어디 있어?”라는 말을 달고 살며 만복을 구박한다. 그렇지만 힘든 순간에 옆에서 함께 걷는 ‘츤데레’ 선배이기도 하다. 만복 역시 자신을 들들 볶는 수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 대신 수지를 닮고 배우려 애쓴다. 여성들의 우정을 남성의 조력이나 방해 없이 온전히 담아낸 좋은 예. 이 영화의 공감 지수를 높인 데는 주인공 심은경의 건강한 매력이 한몫했다. 그는 ‘수상한 그녀’(2014, 황동혁 감독)의 흥행으로 20대 여성 배우로서 독보적 입지를 확보한 바 있다. 여기에 심은경과 호흡을 주고받은 박주희의 탄탄한 연기력도 주목할 만하다.
-미씽:사라진 여자|이언희|엄지원, 공효진|11월 30일 개봉
한매(공효진) 감쪽같이 사라진 조선족 출신 보모. 서서히 드러난 한매의 삶에는 해외 이주 여성이기에 낯선 땅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비밀이 숨어 있다.
★미스터리로 시작해 공감으로 마무리하는 ‘여여 케미’
‘미씽:사라진 여자’(이하 ‘미씽’)는 아이를 빼앗긴 지선이 보모 한매와 딸 다은의 행방을 쫓는 영화다. ‘대체 왜 한매는 지선의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을까?’ 이런 의문을 불러일으키며 강한 미스터리로 단숨에 관객을 몰입시킨다. 건달(박해준)이나 형사(김희원) 같은 몇몇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극의 중심은 단연 지선과 한매다. 두 명의 여성이 이끄는 스릴러영화가 기존 한국 영화계에 매우 드물었던 것은 사실. ‘미씽’은 이런 ‘그림’이 충분히 가능함을 증명했다. 그 바탕에는 여성 작가의 시나리오를 여성 감독이 연출했기에 담아낼 수 있었던, 아주 현실적인 한국 여성의 삶이 녹아 있었다. 이언희 감독은 magazine M과의 인터뷰(192호)에서 “지선과 한매가 서로 복잡한 감정을 느낄 거라 생각했다. 한매에게 지선은 큰 고마움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고용주와 보모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복잡한 관계에 놓인 두 인물은, 여성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는 각자의 자리에서 공력을 쌓아 온 엄지원과 공효진의 연기가 아낌없이 빛났다.
-연애담|이현주|이상희, 류선영|11월 17일 개봉
지수(류선영)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지수. 신분증 없이 들른 편의점에서 선뜻 자신에게 담배를 내민 윤주에게 호기심을 갖는다.
★아주 보통의 커플처럼 사랑하는 ‘여여 케미’
상업 영화에서만 남자들이 중심이었던 것은 아니다. 퀴어영화에서도 남성들의 사랑을 그린 빈도가 훨씬 높았다. 이현주 감독도 그 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한국 여성 퀴어영화는 남자들의 동성애를 다룬 작품에 비해 수도 적고 현실적인 이야기도 드물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렇기에 ‘연애담’은 올해 한국 영화계에서 길어 올린 반짝이는 발견이다. 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도 그렇지만, 성별을 뛰어넘어 가장 보편적인 연애의 과정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그러면서도 여성과 여성이 사랑하기 때문에 부딪힐 법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담담히 들여다본다. 그 덕분에 윤주와 지수의 특급 케미가 폭발했다. 이상희와 류선영의 연기는 보고 또 보아도 좋을, 올해의 ‘여여 케미’ 대상감이다.
-불야성|이재동|이요원, 진구, 유이|방영중(MBC)
세진(유이) 찢어지게 가난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지만 강단 있는 ‘흙수저’다. 우연히 마주친 이경이 자신의 운명을 바꿔 줄 사람임을 직감하고, 그와 손을 잡는다.
★거울처럼 닮은 여자들의 욕망이 더해진 ‘여여 케미’
여성의 욕망이 TV 드라마 주제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 욕망이 남성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했다는 점이다. 부유하거나 ‘스펙’ 좋은 남자를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는 여주인공. 이런 설정은 흔해도 너무 흔하지 않은가. 그러나 ‘불야성’은 조금 다르다. 권력 암투의 중심에 두 여성이 있다. 물론 ‘성별만 바꾸었을 뿐 뻔한 남성적 세계에 바탕을 둔 드라마’라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이 주도적으로 극의 흐름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여여 케미’가 폭발하는 부분은, 이경에게 배신감을 느낀 세진이 위기 속에서 당돌히 맞서는 2화의 한 장면. 어떤 삼각관계 없이, 오로지 두 여성의 주체적 욕망만이 폭발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