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학대 예방한다며 때린 적 있느냐고 묻는 ‘체크 리스트’

중앙일보

입력 2016.12.16 01:39

수정 2016.12.1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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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를 때리거나 신체적 고통을 가한 적이 있다” “도구를 이용해 유아를 위협한 적이 있다.”

교육부가 내년 초 전국 유치원에 보급할 ‘유치원 교직원용 아동권리 보호 자가체크 리스트’에 들어 있는 항목 중 일부다. 지난 14일 공개된 이 리스트는 모두 15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대부분 유아들을 괴롭히거나 왕따시키거나 소홀히 대한 경험이 있는지 여부를 묻는 내용들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유치원 교직원들이 스스로 자신이 가해자가 될 소지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원장이나 다른 교사들이 서로 모니터하기 위한 차원에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체크 리스트 작성은 외부의 아동전문보호기관에서 담당했으며 용역비는 3000만원이 투입됐다.

교육부, 내년 초 전국 유치원에 보급
전문가 “과거 학대 경험만 물어봐
잠재적 가해자 찾기 불가능할 것”
정부선 “직원에게 경각심 줄 것”

그러나 이러한 체크 리스트 항목이 당초 목표대로 아동학대를 줄이거나 예방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본지가 의사·전문가·교직원 등 10명에게 체크 리스트 항목의 분석을 의뢰한 결과 10명 중 9명이 “교육현장에서 전혀 활용되지 않을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분석에 참여한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항목을 처음 봤을 때 유치원 교사에게 익명으로 아동학대 경험을 묻는 문항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가체크 리스트는 한 개인이 아동학대, 왕따의 가해자가 되기 전에 위험 요인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지 파악해 사전 예방 차원에서 실시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교육부의 체크 리스트는 과거 학대 경험만 묻고 있어 잠재적 가해자를 찾아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제대로 현장에서 활용되려면 ‘유아를 때리거나 신체에 고통을 가한 적이 있다’는 문항 대신 ‘말을 안 듣는 아이를 때리고 싶다는 충동이 하루에도 세 번 이상 든다’로, ‘유아에 대한 기본적인 보호와 돌봄을 소홀히 한 적이 있다’는 문항은 ‘유치원이 끝나고 집에 가면 스트레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할 때가 있다’는 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의진 연세대 정신의학과 교수도 “잠재적인 위험을 찾아낼 수 없는 항목만으로 구성돼 있어 아동학대 예방에는 활용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체크 리스트가 지나치게 아동학대에만 초점이 맞춰져 정작 아동권리 보호는 뒷전으로 밀렸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선아 숙명여대 아동복지학부 교수는 “아동에게는 생존권·보호권·발달권·참여권 등 다양한 권리가 있다”며 “학대만 살피지 말고 아이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교육하는지 등을 세세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학대에만 맞춘 체크 리스트는 자칫 교사에게 ‘리스트에 나온 문제 행동만 피하면 된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을 줄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교육부 측은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지만 유치원 현장에서는 왕따·위협·차별과 같은 행위를 여전히 교육 행위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며 “체크 리스트가 교직원에게 아동학대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