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가 5일 새벽 로마 총리궁에서 전날 실시된 개헌안 국민투표 부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렌치 총리는 자신이 정치생명을 걸고 추진한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부에서의 내 경력은 여기서 끝난다. 이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말했다. [로마 AP=뉴시스]
벨렌
러시아 이민자 출신인 판 데어 벨렌은 인스부르크·빈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를 지냈다. 1990년대 녹색당에 참여했고 대표까지 지냈다. 유럽연합(EU) 체제를 신봉하는 그는 장벽 없는 ‘통합 유럽’을 열망한다. 지난 5월 선거에서 그는 예상을 깨고 극우 후보인 자유당의 노르베르트 호퍼를 0.6%포인트 차이로 간신히 따돌렸다. 당시 그는 “유럽의 첫 극우 대통령을 막았다”고 평가 받았다. 그러나 개표 논란 탓에 재선거가 치러졌고, 그 사이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투표와 미국 대선이 치러졌다. 4일 투표하기 전 그는 “오늘 여기서 벌어질 일은 전 유럽과 관련이 있다”며 이번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여론조사 전망을 깨고 또 다시 승리하며 포퓰리즘에 브레이크를 건 “희망의 신호”(가디언)가 됐다.
트럼프 당선시킨 반기성정치 기류
이탈리아선 개혁 개헌안 부결시켜
렌치, 투표 전 약속대로 총리 사퇴
반대운동 극우정당 “남은건 집권”
공영방송 RAI와 LA7 등 이탈리아 방송사는 반대가 54∼59%로 찬성 41∼46%에 월등히 앞선다고 보도했다. 근래 영국·미국에서 여론조사가 틀렸던 전례가 있어서 그래도 지켜보자는 기류였다. 그러나 투표함이 하나 둘 열리면서 이번엔 여론조사가 맞았다는 게 드러났다.
자정 직후 마테오 렌치 총리가 사의를 밝혔다. 국민투표가 부결되면서 물러나겠다는 약속을 따른 것이다. 그는 “놀랍고도 명백한 결과”라며 “전면적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의 내 경력은 여기서 끝난다. 이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도 했다.
어쩌면 그의 패배는 예견된 것이었다. 부결되면 물러나겠다고 약속하면서 개헌안 평가보단 정권심판론이 거세진 때문이다. 막상 투표함 속 내용은 더 참혹했다. 반대가 60%로 찬성(40%)을 크게 앞섰다. 서구 언론들은 “렌치로선 굴욕적인 결과”라고 했다.
이탈리아 정치인인 스테파노 스테파니니는 “이탈리아에서 반유럽, 반기성정치에 대한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준 투표”라고 해석했다. 또 경제적 상실감까지 더해져 포퓰리즘 정당들이 더 대담해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사실 이번 국민투표를 앞두고 개헌안이 부결되면 일부 은행이 쓰러질 수 있다는 경고까지 있었다.
렌치의 오랜 적수인 볼프강 쇼이빌레 독일 재무장관이 “렌치가 이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미국 백악관은 아예 “어떤 결과가 나오든 렌치가 계속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다수의 유권자들은 이 같은 경고에 아랑곳 없었던 셈이다.
영국 BBC 방송은 “EU 지도자로선 이탈리아 걱정에 잠을 자기 어려운 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걱정할 일이 더 많다”고 했다.
이탈리아 경제가 휘청거리며 EU 전체를 더한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여기에 더해 EU의 리더십 위기까지 올 수 있다. 네덜란드·프랑스·독일에 이어 이탈리아까지도 내년에 선거를 치를 수 있다. 그릴로 대표는 “가능한 한 빨리 조기 총선을 치러야 한다”고 요구했다. 뉴욕타임스는 “어쩌면 EU를 세운 주요 국가들이 총선을 치르는 유례 없는 한 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반 기성 정치와 반EU에 대한 감정을 토대로 포퓰리즘 정당들이 크게 약진한 상황에서다.
프랑스에서 프랑수아 피용 공화당 후보와 함께 대선 결선투표행이 유력시되는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는 이탈리아 선거를 두고 “이탈리아가 EU와 렌치는 거부했다. 우린 국가의 자유에 대한 이 같은 갈망에 귀 기울여 한다”고 했다. 네덜란드에선 극우정당인 자유당이 앞서고 있다. 독일에선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처지가 낫다곤 하나 ‘독일을 위한 대안’이 빠른 속도로 세를 불리고 있다. EU가 위기다.
런던=고정애 특파원·홍주희 기자 ockha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