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이훈범의 시시각각] 끈끈이주걱 속의 대한민국

중앙일보

입력 2016.12.05 18:59

수정 2016.12.06 00:44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이훈범
논설위원

“대한민국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그런 충격을 겪고도 달라지지 않을 사회는 단연코 없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 사회 곳곳에 책임을 다하기보다 제 살길 찾기 급급한 저마다의 ‘이준석 선장’이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나라의 키를 쥔 정치권이 특히 더하니 말 다 했다.

세월호 참사를 보고 누구보다 정신을 차리고 단속에 나섰어야 했을 대통령은 최순실이 피운 향불에 의식이 몽롱해져 스스로 키운 암초에 대한민국호를 충돌시켜 놓고는 자기 한 몸 달아날 궁리가 먼저다. 그런 대통령과의 사랑싸움에 그렇잖아도 지리멸렬하던 집권 새누리당은 파산 절차를 밟으면서도 대통령이라는 떨어진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유효슈팅 하나 없이 상대의 자살 골로 승기를 쥔 야당들은 제각각 승리 세리머니에 취해 어디에 다른 암초가 있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내달리고 있다.

누구는 지금이 국가의 틀을 다시 짤 기회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비관적이다. 아니, 세월호 이전은커녕 1970년대 개발독재 시대로 후퇴한 국가의 품격을 보며 절망적이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한동안은 (그 기간이 상당히 길 수도 있는데), 딸 대통령이 명예 회복시켜놓은 아버지 대통령 시대의 끈끈이주걱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나조차 믿기 싫은 예상을 안 할 수 없는 건 한 가지 이유에서다. 발버둥 쳐봤자 이미 끝난 박근혜 시대를 되돌릴 순 없지만, 뒤이어 대통령 되고 집권당 의원 돼 국가의 키를 쥘 인물들이 아까 말한 ‘저마다 이준석’들인데 뭘 기대할 수 있겠냔 말이다. 다른 걸 찾다가 우연히 보게 된 옛 신문기사는 이런 내 불길한 심증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1990년 11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고인이 된 김경수 성균관장이 박기정 정치부장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이 국민 걱정해야 하는데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당시는 내각제 합의각서 유출 파동으로 집권 민자당 대표 김영삼과 대통령 노태우가 갈등하던 시기다. 김 관장은 “모든 걸 이해계산표로 들여다보는 정치 부재가 사회 부조리의 원인이며 대권이든 내각제든 신뢰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상황은 달라도 정치 걱정하는 국민이나, 걱정하는 내용이 26년이 지난 오늘과 똑같다. 이 나라의 정치가 그때에 비해 후퇴했으면 했지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는 얘기다.

이 나라 정치인들이 처음부터 정치를 잘못 배워서다. 플라톤은 “정치는 선(善)의 이데아를 실천하는 것”이라 했고, 공자는 “올바르게 하는 게 곧 정치(政者正也)”라 했다. 올바르게 행하면 백성이 따르고, 그러면 절로 나라가 다스려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땅의 정치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얻는 권력투쟁만이 곧 정치라 알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 온갖 권모와 술수, 공작이 판쳤고 지금도 똑같은 거다.

플라톤과 공자가 올바름을 역설한 건 당시의 현실도 바르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때와 오늘의 민도(民度)는 비교 불가다. 그때와 오늘의 정치 수준이 같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백번 양보한다 해도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나라에서 어떤 위대한 지도자가 공작정치로 국민들을 이끌었나 말해보라. 난 단 한 사람도 찾지 못한다. 이제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0만 명이 넘게 모여도 유리창 하나 깨지지 않는 수준의 백성들 앞에서 어찌 공작을 정치라 우기냔 말이다.

난 거기에서 유일한 희망을 본다. 바른 정치는 수준 높은 국민 참여에서 나온다. 촛불을 켜며 분노만 할 게 아니라 내가 바라는 정치가 어떤 건지 고민하고 토론해야 한다. 촛불이 꺼지더라도 잘 기억했다가 선거에서 사(邪)가 낀 정상배들을 솎아내야 한다.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데 대한 최대의 벌은 악인에게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