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안동국시 제대로 하는 몇 안 되는 집
1969년 시작된 노포, 김영삼 전 대통령도 단골
오픈주방서 면 삶는 모습 보면 마음 푸근해져
몇 년 전 서울 성북동 혜화문 근처 아파트로 이사를 온 후 가을이면 가족과 창경궁을 찾곤 한다. 산을 오르지 않고도 도심 한 가운데서 멋진 단풍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고 나서부터 말이다. 찬바람이 제법 느껴지는 늦가을의 주말 아침엔 옷을 따뜻하게 껴입고 집을 나선다. 혜화문에서부터 시작해 혜화동 로터리를 돌아 성균관대 입구를 거쳐 궁 옆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덧 창경궁에 도착한다.
도심 한가운데서 고궁이 전해주는 아늑함과 여유로움도 더 없이 좋은 선물이지만 고궁을 둘러싼 가을 단풍 풍경은 한마디로 감동 그 자체다.
그렇게 식구들과 한 두 시간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몸도 녹일겸 늦은 점심을 하러 꼭 들리는 식당이 있다. 혜화문을 끼고 돌면 보이는 ‘국시집’이다. 서울에서 안동국시를 제대로 한다고 알려진 몇 안 되는 집이다.
세상 많은 것들이 변해왔어도 시간이 멈춘 듯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노포다. 1969년 시작했으니 자연스레 식당과 관련된 이야기도 넘쳐난다. 고(故) 김영삼 대통령 등 숱한 정·재계 인사가 단골이었고, 내 또래 동네 토박이들도 이 식당과 얽힌 추억 한 두 개씩은 갖고 있을 정도다. 처음 이곳을 찾게 된 것도 성북동 토박이 친구의 소개였다.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 운동회를 마치고 가족과 외식하러 왔을 때의 그 김치 맛과 국물 맛 그대로”라고 말하는 친구 눈에서 아련함이 번졌다.
그런 이야기를 뒤로 하더라도 2대에 걸쳐 한결같은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느낌은 내가 1년에 몇 번 창경궁을 찾을 때 느끼는 아늑함과 비슷하다.
국시집에 왔으니 안동국시를 먹어야하지만 그 전에 꼭 먹어야 할 다른 메뉴가 있다. 수육과 청포묵이다. 세심하게 뚜껑을 덮은 그릇에 담겨 나오는 수육은 지방이 많지 않아 살짝 푸석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젓가락으로 집는 순간 부드러운 촉각이 전해져 굳이 입안에 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깻잎 장아찌에 함께 싸 먹으면 그 맛 역시 독특하다. 청포묵은 다진 고기와 김, 절인 오이채, 참깨가 곁들여지는데 고소한 향을 풍긴다. 집 간장으로 살짝 간을 해 볶았는데 한번 젓가락질을 시작하면 접시가 비워질 때까지 멈출 수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안동국시. 화려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다. 하지만 그 맛의 깊이는 이 가게의 세월만큼 진하다. 알맞게 익어 풀어진 면발과 슴슴한 사골국물에 약간의 호박과 간 소고기 고명만으로 이렇게 편안하고 포근함을 줄 수 있다니. 아내는 이 집 국수를 먹을 때마다 어릴 적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말한다. 경북 안동 인근 출신인 아내의 외할머니는 손수 밀대로 밀어 면을 만들고 가마솥에 육수를 끓여 국수를 만들어주곤 하셨단다.
안동국시 한 그릇까지 깨끗이 비우고 나면 하루짜리 도심 단풍 여행은 마무리된다. 집으로 돌아가며 문득 드는 바람은 오늘의 산책과 따끈한 국시 한 그릇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따듯하고 포근한 추억으로 남았으면 하는 것이다. 아무리 첨단을 걷는 시대라 해도 오래도록 인정 받는 것은 시간 속에 걸러지는 것들이다. 그런 게 살아남아 클래식이 된다. 기본에 충실한 이런 음식의 가치를 내 아이들도 오래도록 누리고 즐기길 소망한다.
국시집
● 전화 : 02-762-1924
● 영업시간 : 낮12시~오후2시30분, 오후5시~8시30분(명절휴무)
● 주차 : 가능
● 메뉴 : 안동국시(9000원), 수육(소 1만8000원, 대 3만3000원), 청포묵(1만원)
● 드링크 : 소주(4000원), 맥주(4000원)
이주의 식객
김석원 패션 디자이너. 아내 윤원정과 함께 브랜드 ‘앤디 앤 뎁(ANDY & DEBB)’을 17년째 이끌고 있다. 언제나 포마드를 이용한 2:8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는 젠틀맨. 업계에선 오래된 자타 공인 미식가. TV 맛프로 ‘수요미식회’에도 가끔 얼굴을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