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소 자격이 없는 소민(小民) 동학도에게 고종은 조선 공론정치의 율법을 어기고 어지(御旨)를 내리는 아량을 베풀었다. 122년 후 대통령은 청와대에 있다. 청와대 사람들은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메시지만을 몇 차례 발령했다. 누구의 뜻인지는 불분명했다. 5차 촛불집회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관저 깊숙이 박혀 있다. 눈발이 조금 날리고 촛불이 점멸하고 함성이 일었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저 어디가 끝인가?
국민·정치권 부가된 짐 산더미
촛불의 가시적 결실 보여주려면
‘정당 재정렬’이 필수적 조건
개헌은 차기 정권에 착수할 과제
탄핵·개헌·대선의 동시 수행은
현재의 정당 구도로는 불안해
비박의 집단 탈당과 신당 창립이 시급해진 이유다. 머뭇거리는 40여 명 비박계 의원은 이미 망가진 새누리당에 어떤 미련이 남아 있는가? ‘민주의 집’ 잔해 속에 새누리당도 묻혔음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가? 김용태 의원과 남경필 지사는 백의종군했다. 신보수의 새로운 정치거점이 구축돼야 야당도 정신을 차리고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정치일정에 함께 대비할 수 있다.
촛불 민심을 국민주권적 시민정치의 동력으로 승화시키려면 정당의 경쟁구도가 복원돼야 한다. 한 축이 무너진 채로는 버거운 정치일정을 소화할 수 없고, 대선에서 불법이 낄 여지를 감시하지도 못한다. ‘보수의 대참사’가 일어났으므로 진보정권에 차례를 넘기는 것이 순리지만, 세력 균형이 깨진 대선판은 반드시 대규모의 불복세력을 생산한다. 그건 지금보다 더 큰 정치적 재앙이다.
뭔가 촛불의 가시적 결실을 보여주려면 ‘정당 재정렬’이 필수적 조건이다. 손학규, 반기문이 새로운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안철수든, 비박계든 손·반 연대의 연출가로 나서 성사시킨다면 그런대로 경쟁적 정당구도가 만들어진다. 명패만 남은 집권여당의 허망한 집터에 앉아 틈새 반격을 잘도 해내는 이정현 대표와 친박계 의원들은 과연 ‘고목처럼 쓰러진 보수’의 참담한 현실을 직시하고는 있는가? 야당과 함께 쓰나미 정국을 헤쳐 나가려면 새누리당 장례식을 얼른 치르고 조속히 신보수 정당을 신축하는 것이 순서다. 개헌은 차기 정권의 순산(順産) 이후에나 착수할 과제다. 현재의 정당 구도로는 탄핵, 개헌, 대선의 동시 수행이라는 ‘가보지 않은 길’이 불안하기만 하다. 미국 시인 프로스트(R. Frost)는 이렇게 읊었다. “먼 훗날 어디선가 나는/한숨 쉬며 이렇게 말하려나/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덜 다닌 길을 갔었노라고/그래서 인생이 온통 달라졌노라고.”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