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미국 적과의 화해 제스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표변(豹變)이 시작됐다. 대통령 선거 기간 주장했던 온갖 강경 구호와 거친 비난을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표범이 철 따라 털갈이하며 아름답게 변하듯 군자는 허물이 있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변신할 줄 알아야 한다는 『주역(周易)』의 가르침을 트럼프가 실행하는 모양새다.
NYT는 이번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트럼프의 세금신고 내역서를 폭로하는 등 ‘트럼프 죽이기’에 앞장섰던 신문이다. 트럼프는 선거기간 중 NYT 기자를 “세상에서 가장 못되고 부정직한 이들”이라 비난했다. “당선되면 바로 소송을 걸 것”이란 협박도 했다. 그런 ‘원수’의 집에 스스로 발을 옮긴 것이다. 먼저 발행인 겸 회장인 아서 설즈버거 주니어와 15분간 비공개 회담을 나눈 트럼프는 논설실장·편집국장·칼럼니스트·기자 23명과 점심을 함께 하며 1시간 정도 공개 간담회를 했다. 트럼프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말은 거침없이 했다. 그는 “당신들은 (선거기간 중) 나를 가장 거칠게 다뤘다. 당신들은 ‘워싱턴포스트도 그랬잖아’라고 할지 모르지만 WP는 그래도 가끔 좋은 기사를 썼다”고 비꼬았다.
트럼프, 앙숙 NYT 본사 직접 방문
“새로 시작하고 싶다, 그게 내 업무”
“클린턴 e메일 기소하면 분열 초래”
재수사로 감옥 보낸다던 발언 철회
트럼프의 이날 행보는 이랬다. 22일 오전 6시16분 트위터에 ‘NYT 방문 취소’ 띄움(“NYT가 면담 형태를 비공개에서 공개로 전환했다”는 이유였지만 NYT는 “원래 공개였다” 반박)→NYT와 협상해 일부 비공개, 일부 공개로 조정→NYT 비난과 극찬, 관계 개선 의지 피력→양측 만족(합의) 수순을 밟았다. 상대방을 혼란케 한 다음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가는 트럼프의 전형적 협상 스타일이다.
이날 트럼프는 NYT에 굵직한 단독 기사도 선물했다. 당초 공약을 뒤집고 실용주의 노선을 걷겠다는 약속을 했다. 첫째, 클린턴을 사법 처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날 트럼프는 “클린턴을 기소하는 것은 미국을 매우 분열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 지지자들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검사를 임명해 e메일 스캔들과 클린턴재단 문제를 재수사, (클린턴을) 감옥에 보내겠다”고 했던 발언을 철회한 것이다.
둘째, 트럼프는 파리기후변화협약 관련 질문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발 물러섰다. 기후변화협약을 폐기하겠다는 게 당초 공약이었다. 그는 이날 “난 인간의 활동과 기후변화 간에 어느 정도의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셋째, 수사기관의 고문 포기를 선언했다. 그는 “고문보다는 테러 용의자들과 신뢰를 구축하고 협조에 대해 보상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란 (유력 국방장관 후보) 제임스 매티스 전 장군의 말이 내 마음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대선 승리로 그의 사업체들이 이득을 볼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법은 완전히 내 편이다. 대통령에게는 이해상충 같은 것은 없다”고 밝혔다. 트럼프의 발언은 기술적으로는 사실이지만 윤리적으로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미 언론은 지적했다. 트럼프는 맏딸 이방카의 활동에 대해서도 “그 사람들 말대로 한다면 이방카를 결코 보지 못할 것”이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트럼프는 또 비선 실세인 유대인 사위 재러드 쿠슈너에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조정 역할을 맡기겠다고 말했다. 그는 “(쿠슈너가) 이·팔 평화(협상)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직 경험이 없는 쿠슈너가 역대 정권에서 풀지 못한 이·팔 분쟁을 조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의회 전문 매체 더힐이 전했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