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어릴 적 엄마의 잔소리쯤으로 들린다. 유대인에게는 다르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정결하게 씻는 건 유대인들의 율법이다. 랍비 예후다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다섯 살에 성경을 읽고, 열세 살에는 계명을 준수한다”고 돼 있다. 어릴 적부터 율법은 유대인의 몸과 마음에 깊숙이 박힌다. 그들에게 율법은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그 대가로 신은 구원을 약속한다. 그러니 손을 씻지도 않고 음식을 먹는 일은 영혼의 생사(生死)를 가르는 문제다.
예수 당시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에게 다가왔다. 모두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이렇게 따졌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어깁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5장2절) 단순히 손을 씻고, 안 씻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세수(洗手)’를 하지 않는 건 바리새인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이 구절만 봐도 예수 당시 유대 사회의 교조적 분위기가 읽힌다.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은 이미 이데올로기가 돼버린 상태였다.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신의 가르침도 그들이 만든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무력했다.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음식도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쳤다고 하면 모든 게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하느님’만 내세우면 모든 게 통했다. ‘하느님’이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사회였다. 그러니 예수는 얼마나 갑갑했을까. ‘신의 속성’도 모르는 이들이 하느님의 깃발만 꽂아대고 있으니 말이다.
유대의 율법을 하나씩 따져보면 저마다 이유가 있다. 유대 율법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처음에 손가락들은 대부분 달을 가리켰을 터이다. 그게 손가락이 생겨난 이유였다. 율법이 태어난 까닭이다. 그런데 1000년, 2000년, 3000년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졌다. 달은 어느덧 사라지고 손가락만 남았다. ‘이유’는 사라지고 ‘격식’만 남았다.
나는 광장의 수돗가에 가서 손을 씻었다. 차가웠다. 요르단강에서 예수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때 예수는 손이 아니라 몸 전체를 물에 담갔다. 일종의 ‘씻어내림’이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기 전에 꼭 손을 씻는다. 그 역시 ‘씻어내림’이다. 무엇에 대한 씻어내림일까. 우리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온갖 감정과 생각과 욕망의 뿌리에 대한 씻어내림이다.
나는 묻고 싶다. 그 순간에 왜 성령이 내려왔을까. 왜 하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앉았을까. 예루살렘의 햇볕은 따갑다. ‘통곡의 벽’ 광장 귀퉁이의 그늘로 갔다. 바닥에 주저앉아 나는 성경을 펼쳤다. 그 대목을 다시 읽으며 묵상했다.
그랬다. 하늘이 열리기 전,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기 전, 하늘의 소리가 들리기 전에 계단이 하나 있었다. 그게 없다면 하늘이 열렸을까. ‘비둘기’가 내려왔을까. 하늘의 소리가 들렸을까. 그 계단이 있기에 하늘이 열리지 않았을까. 그게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이 될 수 있고,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계단’이 과연 뭘까.
예수에게 밥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느냐, 씻지 않느냐는 핵심이 아니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그다지 문제될 게 없었다. 예수는 ‘이래야 해!’라는 율법이 아니라 ‘왜 이래야 해?’라는 율법의 뿌리를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는 손을 씻느냐, 씻지 않느냐가 아니라 마음을 씻느냐, 씻지 않느냐가 더 핵심이었다. 그걸 모르는 바리새인들이 와서 “음식을 먹기 전에 왜 정결례를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던 것이다.
결국 헛바퀴다. 우리는 자전거 안장에 앉아 교리만 달달 외우며 헛바퀴를 굴리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바퀴가 땅에 닿아 ‘신의 속성’을 향해서 떼굴떼굴 굴러가려면 ‘입술’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그러려면 ‘물’을 통과해야 한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그걸 통해 ‘나의 집착’이 부서져야 한다. 그럴 때 바퀴가 구르고 마음이 움직인다. 나의 마음에서 신의 마음으로 돌아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경이다. 그게 없이 예수를 섬기는 이들을 향해 예수가 말한다. 이사야의 말을 빌려 말한다. “너희는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마태복음 15장10절)
예수는 그저 “내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았다. “듣고 깨달아라”고 했다. 왜 그럴까. 예수의 메시지는 ‘씨앗’이다. 예수의 말을 듣는 건 씨앗을 심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의 씨앗은 심기만 한다고 싹이 트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씨앗을 심어도 시간이 흐르면 그냥 썩고 만다. 씨앗에서 싹이 트려면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아하! 그렇구나”하는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나의 깨달음이다. 그게 있어야 예수의 씨앗이 내 안에서 싹이 튼다. 싹이 트야 뿌리도 내린다. 그래서 예수는 듣는데서 그치지 말고 “듣고서 깨달아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예수의 반박은 명쾌하다. 그의 반박은 이치를 관통한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간다. 입으로 들어간 것은 모두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구멍으로 들어온 것은 구멍으로 나간다. 그게 코든, 입이든, 귀든, 항문이든, 땀구멍이든 말이다. 그러니 문제가 없다. 입으로 들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다. 입에서 나오는 게 문제다. 그게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의 통찰은 놀랍다. 그는 입에서 나오는 것들의 뿌리를 지적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입에서 나오는 건 마음에서 나온다.” (마태복음 15장18절)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말을 깨닫지 못했다. 이해하지도 못했다. 성경에는 그들이 예수의 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돼 있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라고 질타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며 위험까지 예고했다. 2000년 전에 예수가 던진 이 메시지는 ‘2016년 겨울의 문턱에 선 대한민국’을 겨냥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출발점도 따지고 보면 1970년대 중반 ‘구국선교단’을 조직해 국정을 농단했던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30년간 각종 공식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14차례에 걸쳐 최태민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한결같이 “사심이 없는 사람” “고마운 분” “저를 옆에서 도와주신 분”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가 아니라 정식 기독교 목사였다”고 답한 적도 있다. 박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최태민에 대해 “사이비 종교인”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신흥종교ㆍ이단문제 전문가였던 탁명환(1937~94)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이 생전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목사가 되기 전 최태민은 무속인에 더 가까웠다. 그는 1973년 대전시 대사동 196번지에 있던 감나무집에 머물며 자신을 “영세계(靈世界)에서 온 칙사”라고 밝혔다. 보문산 골짜기에 있는 그 동네는 대전 지역 초등학생들의 단골 소풍 장소였다. 근처에 전망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전이 고향인 중앙일보의 한 편집기자는 “당시 그 동네에 무당들이 많이 살았다. 무당집의 울긋불긋한 깃발도 곳곳에 꽂혀 있었다. 최태민이 살던 73년 봄에도 나는 그곳으로 봄소풍을 갔다. 최태민이 살았다는 감나무집 주소를 구글 지도에서 찍어봤다. 정확하게 그 동네가 나오더라”고 말했다.
당시 최태민은 영세교(靈世敎)라는 종교를 만들었다. 신도는 별로 없었다. 신흥종교를 꾸리려면 교단과 교리, 그리고 교주의 삼박자를 갖추어야 한다. 최태민에게는 조직이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의 이단문제 전문가들도 ‘기독교 이단사’에서 최태민의 영세교를 하나의 줄기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사이비 종교’라기보다 최태민을 그저 ‘사이비 종교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에 빠졌느냐, 빠지지 않았느냐”는 물음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최태민이 교단을 꾸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박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인’에 빠졌느냐, 빠지지 않았느냐”는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만약 최태민을 ‘사이비 종교인’이라고 본다면 박 대통령은 “나는 사이비 종교인에 빠졌었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만약 최태민을 ‘사이비 종교인’이 아니라고 본다면 의혹은 더 크게 남는다.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인’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종교계 최고지도자들을 청와대로 불러서 대화를 나눈다고 이런 의혹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물타기를 위한 쇼가 아니냐?”는 의구심만 증폭될 뿐이다. 나는 지금이라도 묻고 싶다. 그리고 듣고 싶다. 박 대통령이 ‘영(靈)의 세계에서 온 칙사’라고 자칭했던 최태민을 지금은 어찌 보는지 말이다. 20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예수의 경고는 ‘최순실 국정농단 정국’의 심장을 찌른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마태복음 15장14절)
<36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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