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하나는 예산을 빼먹는 것이다. 예산은 연간 400조원(2017년 기준)을 넘는 황금어장이다. 하지만 기업 돈을 뺏는 것보다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이다. 예산을 요청한 부처에서 속사정을 알 수밖에 없다. 진짜 필요한 사업인지, 누구의 이권이 걸린 건지 등등. 기획재정부 예산실 공무원도 모를 리 없다. 부처 실무자와 1년 내내 사업 타당성을 협의하기 때문이다. 허술하지만, 국회도 예산을 들여다본다. 예산안을 확정하기 전에 심의한다. 쓰고 난 뒤 결산도 한다. 논란이 있는 사업은 시민단체가 검증하기도 한다. 이중 삼중의 감시망이 있어 예산을 빼먹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의 비선 실세는 주로 기업 돈을 챙겼다. 최순실 일당이 놀라운 건 기업 돈은 물론 예산까지 노렸다는 점이다. 시정잡배 수준 같지만, 만만치 않다. 예산을 넘볼 정도로 수법이 대담하고 지능적이다. 예산은 한번 끼워 넣기만 하면 큰 문제가 없는 한 ‘계속사업’으로 굴러가는 맹점이 있다. 잘만 엮어놓으면 정권이 바뀐 뒤에도 적당히 빼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순실 일당이 예산을 얼마나 빼먹었고, 빼먹을 계획이었는지 정확지 않다. 더불어민주당은 2017년 예산에서 최순실 예산을 20여 개 사업, 5200억원으로 추산했다. 국민의당은 4200억원으로 봤다. 주로 문화·창조·융합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사업이다. 최순실 일당이 문화체육 예산과 창조경제 예산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전제 아래 추산했다. 유감스럽게도 최순실 예산은 더 구석구석 퍼져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쌀 가공식품을 저개발 국가에 지원하는 케이밀(K-meal) 사업 20억원이 최순실 예산으로 지목받고 있다. 문화체육·창조경제와 관련 없는 농림수산 예산이다.
2017년 예산은 뒤죽박죽이다. 신뢰를 잃었다. 의심스러운 사업은 죄다 타당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최순실 예산을 고기에서 비계 도려내듯이 잘 발라내야 한다. 문제는 시간이다. 내년 예산을 다시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촉박하다. 시국과는 별개로 당장 정부와 국회가 예산부터 검토했으면 한다. 이 과정을 안 거치고 대충 넘어가면 두고두고 논란이 될 소지가 있다.
더 난감한 문제는 이미 집행한 예산이다. 2013년 예산은 이명박 정부에서 만들었다. 이론적으로 최순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예산은 2014년부터다. 일례로 차은택이 기획한 문화창조융합벨트 예산은 2014년에 처음 71억원 등장했다. 지난해 119억원, 올해 903억원으로 급격하게 늘었다. 이미 1093억원이 어디론가 나갔다. 이 돈을 포함해 지난 3년간 최순실 예산으로 나간 돈이 얼마이고, 어떻게 쓰였는지 따져봐야 한다. 검찰 수사도 이 점을 놓치면 안된다. 최순실 일당에게 흘러들어 갔으면 특별법을 제정하든지 구상권을 청구하든지 무슨 수를 쓰든 되찾아야 한다.
예산 빼먹기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범죄다. 특정 기업을 등치는 것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예산을 짠 정부와 자동문처럼 통과시킨 국회는 작금의 상황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최순실 예산을 알고도 묵인했으면 직무유기이고,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다. 정부는 자신들이 만든 예산안에 칼을 대는 게 무참해서인지 여전히 변명하기 바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거나 정신을 못 차렸다. 뼈아픈 마음으로 반성하고, 반면교사로 삼지 않으면 이런 일은 또 생길 수 있다.
짚고 넘어갈 게 하나 더 있다. 최순실 예산을 줄이는 틈을 타 국회에서 다른 예산을 끼워 넣는 얌체 짓은 곤란하다. 창업, 한류, 평창 올림픽 같은 중요한 이슈가 최순실 쓰나미에 휩쓸려 옥석 구분 없이 훼손되는 일도 없어야겠다.
고 현 곤
신문제작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