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희의 맛따라기] 선육후면(先肉後麵)…떡갈비·평양막국수가 찰떡궁합 ‘동신면가’

중앙일보

입력 2016.11.18 00:01

수정 2016.11.1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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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떡갈비(250g)에 미니 떡만두국과 밥이 기본찬과 함께 나오는 ‘동신면가’ 점심특선 소떡갈비정식(1만9000원).

이 음식점에는 지난 14일 올해 처음 햇메밀 녹쌀(겉껍질만 벗긴)이 들어왔다. 내몽골에서 수확한 중국산 메밀이다. 원산지와 가까운 지역에서 재배해 품질이 좋다. 음식점 현관에는 제분기와 메밀 자루가 보인다. 아침마다 필요한 만큼 빻아서 ‘평양막국수’(7000원)를 뽑는다. 면은 지난 여름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울 유명한 집들의 1만~1만4000원짜리 평양냉면에 밀리지 않을 맛이다.

소떡갈비(250g 1만8000원). 1000원을 더 내면 밥과 된장국도 먹을 수 있다.

암사동 선사유적지 이웃에 있는 동신면가(서울 강동구 올림픽로 803 암사역 4번 출구 나가서 280m/전화 02-481-8892)는 동두천에서 1964년 개업해 3대 52년을 이어오고 있는 이북음식 전문점이다. 평양막국수·떡갈비로 유명하다. 음식점 입구에는 ‘선육후면(先肉後麵)’이라는 입간판이 있다. 냉면 애호가에게 선주후면(先酒後麵)은 입버릇이지만 선육후면이라니 궁금해진다. 떡갈비(250g 소 1만8000원, 돼지 1만원) 먹고 평양막국수 먹으라는 얘기다. 그럼 술이야 자동으로 따라가지 않을까. 파채무침과 함께 나오는 양무침(1만8000원)도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 이밖에 숯불갈비(300g 한우 생 4만5000원, 양념 왕 2만8000원/돼지 250g 1만3000원)·보따리만두(7000원)·떡만두국(8000원)·양곰탕(8000원)·갈비탕(9000원)도 있다.

상호가 면가(麵家)이고 이북음식점이니 대표 메뉴는 메밀면인 평양막국수. 낯선 이름이다. 사연이 있다. 막국수는 메밀 함량이 70%다. 날마다 자가 제분한 가루로 뽑는다. 나머지 30%는 밀가루·전분을 섞는데, 기온에 따라 비율이 바뀐다. 여름에는 전분이 최고 20%에 밀가루 10%, 겨울에는 밀가루가 더 많이 들어간다. 막국수 국물은 육수 75% 동치미국물 25% 비율로 배합한다. 육수는 소·돼지·닭 3가지 고기 국물을 섞어 만든다. 소 갈비 만들고 남은 자투리 고기와 사골, 돼지고기 정육, 닭 부산물을 쓴다. 막국수에 편육이 안 올라가기 때문에 소고기 정육을 쓰지는 않는다. 동치미는 무를 주재료로 고추 몇 개만 넣고 다른 채소는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까지 보면 아주 제대로 조리한 평양냉면이다. 잘 익은 동치미국물이 들어가 맛이 더 진하고 고풍스럽다. 마지막 그릇에 담을 때 편육이 올라가지 않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왜 평양막국수일까.

‘동신면가’를 대표하는 평양막국수. 당일 제분한 메밀가루 70%의 순도 높은 메밀면이다. 편육을 올리지 않은 것 말고는 평양냉면과 다를 바 없다. 국물은 3가지 육수와 동치미를 75대 25로 섞었다(7000원).

현재 음식점을 운영하는 2대 주인 박영수(63)씨 부모님이 동두천에서 처음 낸 음식점은 ‘평안냉면’이었다. 1984년 대물림 한 아들이 서울 올림픽공원 옆으로 옮기면서 ‘동신떡갈비’라는 상호로 정육점을 겸한 고깃집으로 확장했다. 냉면의 맥은 이어졌다. 2000년 주차장을 확보하기 위해 암사동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이사 와서 보니 냉면 찾는 사람이 없어요. 먹은 사람도 분식집 질긴 냉면을 기준 삼아 면이 왜 이렇게 매가리 없느냐고 항의하기 일쑤예요. 이게 무슨 냉면이냐며 돈 못 내겠다는 사람까지 있었어요. 누군가 막국수라고 하면 쉽게 접근하지 않겠느냐고 조언을 해줘서 지난해 5월에 ‘막국수’라고 이름을 바꿨어요. 상호도 ‘동신떡갈비’에서 ‘동신면가’로 바꿨지요. 그랬더니 이번엔 막국수 마니아들이 이게 무슨 막국수냐 평양냉면이지, 하고 따지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연말에 ‘평양막국수’라고 다시 바꿨습니다.”

떡갈비와 평양막국수를 어울려 먹으면 좋다는 ‘선육후면(先肉後麵)’ 안내판이 식당 입구에 서있다.

나는 평양냉면을 자주 먹지만 냉면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메밀 마니아다. 그 맛에 인이 박여 어떤 때는 일주일 열네 끼 중 다섯 끼를 메밀음식으로 먹은 적도 있다. 이육사 시인의 고장(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은 7월(음력)이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라면 인삼이 많이 나는 내 고향 충남 금산은 메밀 씨앗을 뿌리는 시절이었다. 8월(양력)에 인삼을 캐서 곡삼(曲蔘)으로 만드는 후속작업을 마치고 한숨 돌리면 대략 8월 하순이 된다. 그때는 밭에 심을 작물이 마땅치 않다. 김장배추를 심으면 좋지만 생육기간이 70~90일 되기 때문에 된서리 내리는 11월 초쯤 수확하려면 8월 중순 이전에 파종을 해야 한다. 노령산맥이 굴기(?起)하는 깊은 산골이어서 겨울이 빨리 오기도 했다. 말미가 아슬아슬하다. 이런 상황에서 김장배추로 모험을 하기는 너무 위험하다. 김장농사를 실패하면 겨울 찬거리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삼 캔 밭에는 대개 가을메밀을 뿌렸다.

평양막국수의 고명을 얹고 있는 총주방장 김문자 여사. 경기도 양주 출신이지만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시어머니 주방 일을 10년간 도우며 이북음식 솜씨를 고스란히 전수했다.

메밀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구황작물(救荒作物)이었다. 기상조건이 안 좋거나 거친 땅에서도 강인하게 자라며 생육기간이 짧아 가뭄으로 모내기 때를 놓쳤을 때 심어도 수확이 가능했다. 특히 가뭄과 추위에 강하다. 마른 땅에서도 싹이 잘 트고 60일 지나면 결실을 시작하므로 생육기간은 짧다. 결실은 기상 여건이 좋으면 한 달쯤 계속된다. 잡초 밭에 씨앗 하나가 떨어져도 다른 풀보다 빠르게 붉은 대를 키워 햇빛을 선점하고 여 보란 듯 꽃을 피운다. 메밀의 고어는 ‘모밇’인데 어원은 ‘뫼(山)+밇’이다. 메밀의 ‘메’는 ‘멧돼지’에서와 같이 ‘산’이라는 뜻의 접두사이므로 ‘산에 자라는 밀’이라는 뜻이 된다.

내 고향에서는 인삼 캔 밭에서 수확한 메밀로 묵을 쒀 먹었다. 두부 만들 때처럼 물 부어가며 맷돌로 타서 베자루로 짠 다음 묵으로 끓였다. 메밀로 국수나 다른 음식을 하는 건 본 적이 없다. 하루 해는 짧고 힘쓸 일 별로 없는 겨울철에 점심은 글자 그대로 마음에 점을 찍는 정도로 간단히 때웠다. 채친 메밀묵을 장국에 말고, 김장김치 잘게 썰어 올린 묵말이에 남은 밥 한 덩이 말아서 먹었다. 1960년대 농가 대부분이 그랬다. 그 바람에 어릴 적 메밀묵을 자주 먹었다. 메밀을 수입하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시절, 식량이 모자라는데 해 넘겨 묵힐 일도 없으니 온전히 국산?햇?메밀?100%였다. 요새 냉면 마니아들이 들으면 군침을 삼킬 얘기다. 평양냉면을 비롯한 메밀 음식을 요즘도 쫓아다니는 나의 내력이다.


▼ '동신명가'의 다른 음식들
돼지떡갈비(250g 1만원)
돼지떡갈비정식(2인상/1인 1만1000원)
양무침(1만8000원)
한우생갈비(300g 4만5000원)
숯불에 굽고 있는 한우생갈비
양념왕갈비(300g 2만8000원)
숯불에 굽고 있는 양념왕갈비
떡만두국(8000원)
보따리만두(7000원)
조리외식경영학 박사로, 의정부 신한대 외식산업 최고경영자과정 주임교수를 겸하고 있는 박영수 대표는 휴전 전날인 1953년 7월 26일 대전에서 태어났다. 평북 정주와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부모님이 1·4후퇴 때 월남해 자리 잡은 곳이다.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는 정치적 외풍으로 1964년 사업을 접었다. 박 대표가 서대전초등학교 5학년일 때였다. 친척이 사는 동두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냉면집을 차렸다. 음식업 3대 52년 역사의 시작이다.

젊어서 박 대표는 음식사업이 내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군을 제대하고 기업에 취직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던 현대건설에 들어갔다. 그러나 만 30세에 회사를 그만뒀다. “남의 집 살이 할 팔자가 아닌가 봐요. 상명하복 철저하고 건설회사 거친 기업문화가 체질에 맞지 않더라고요. 견디지 못했습니다. 내 일을 내가 이끌고 가는 일이 성격에 맞을 것 같아서 그만두고 음식점을 열었습니다.”
1984년 서울 강동구청 앞에 정육식당 형태의 음식점을 열고 가업을 물려받아 근거지를 옮겼다. ‘동신(東信)’으로 바꾼 상호에는 동두천에서 서울 동쪽으로 옮겨 좋은 음식으로 신용을 쌓고 신임을 얻어 성공하겠다는 다짐과 희망을 담았다. “정육점을 겸하는 식당이었어요. 부모님 때부터 관찰해보니 음식점은 돈 벌어서 육곳간에 다 갖다 바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고기 유통을 직접 했지요. 아버지께 이전부터 말씀을 드리니까 ‘식당 하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나보고 백정질까지 하라는 거냐? 못한다’ 하며 역정을 내셨어요. 지켜보다가 제가 주도권 잡고 하면서 정육점을 겸했죠. 그 덕에 고기 유통에 대해 제대로 배웠습니다. 좋은 고기 제 값에 살 수 있게 되고, 원가절감 많이 했지요. 지금도 사업 노하우 중 하나입니다.”

이북음식 전문점 ‘동신면가’의 3대 52년을 이끌어가고 있는 김문자·박영수씨 부부가 주방에서 환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했다.

현재 동신면가의 맛을 책임지는 사람은 박대표의 부인 김문자(64) 여사다. 서울에 음식점을 열면서 주방에 처음 들어가 시어머니를 도우면서 솜씨를 물려받기 시작해 32년을 계속했다.

“아내는 음식을 정말 못했습니다. 할 줄 아는 게 없었어요. 신혼 때 음식을 했는데 못 먹겠더라고요. 그 문제로 다투기도 하고, 내가 해먹기도 했어요. 종가의 딸이어서 보고 배운 게 많아 잘할 줄 알았는데 늦게 둔 딸이라 귀여워만 했지 일은 배운 게 없었어요. 어머니는 음식을 잘했지만 정해진 조리법 없이 몸에 익은 대로 했습니다. 주변에서 맛있다 맛있다 하니까 자기도취가 돼 열성으로 했지만 내가 먹어보면 컨디션 따라 음식 맛이 많이 달랐습니다. 내가 입맛이 예민해서 그걸 지적하면 ‘넌 고생을 안 해봐서, 배시때기가 불러서 음식 타박한다’고 야단만 쳤습니다. 그런 고부가 주방 일을 함께 하게 되니 아내가 음식을 모르는 게 오히려 장점이 됐습니다. 모르니까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잘 배웠죠. 틀릴까 봐 어머니가 알려주면 일일이 달아 보고 재 보고 해서 모든 걸 계량화했습니다. 1993년 어머니가 시애틀의 여동생 집으로 가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그렇게 배우면서 자기 레시피를 만들었습니다.”

박영수 대표가 중학교 1학년이던 1966년 부모님이 운영하던 동두천 ‘평안냉면’ 앞에서 여동생과 함께. 두 살 아래 여동생은 현재 미국 시애틀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오빠가 어머니를 너무 부려먹는다며 1993년에 모셔갔다.

1972년 대학 1학년 때 처음 마련한 양복을 입고 아버지와 사진을 찍었다. 6년 전 여동생과 사진을 찍은 자리다. 그 사이 냉면집 모습이 바뀌었다.

1984년 올림픽공원 옆에서 시작한 가업 2기 식당인 ‘동신떡갈비’. 부모님이 하던 평양냉면에 이어 새로운 주력 상품으로 떡갈비를 완성한 무대다.

동신의 떡갈비가 제법 사람들의 입맛을 맞춰 가던 1980년대 중반 백파 홍성유(1928~2002)는 음식점 주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소설가이면서 식도락가였던 그는 『한국의 맛있는 집』이라는 책의 증보를 거듭하면서 향토 맛집을 발굴?소개하는 분야에서 독보적 활동을 펼쳤다. ‘999점’에서 시작해 ‘1234점’까지 판을 거듭했다. 박영수 대표도 그 책에 실리고 싶었다. ’우리 집에는 안 오시나’ 애타게 기다렸다. 명절 연휴를 앞둔 어느 날 나름대로 자신이 있던 떡갈비를 만들어 싸 들고 광장동 백파 댁으로 찾아갔다. 백파는 “이렇게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라며 표정 없는 얼굴로 “놓고 가시오”라고 했다. 명함을 드리며 “맛이 괜찮으면 음식점에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부탁하고 나왔다. 백파는 연휴에 집에 찾아온 친구들과 떡갈비를 나눠 먹었고, 모두들 맛있다고 했다 한다. 명절 지나고 오래지 않아 백파가 음식점에 찾아왔다. 그가 연재하던 주간지에 기사가 나갔다.

“그 인연으로 백파의 비서 겸 운전기사 겸 기록요원 겸 동생이 됐습니다. 나이는 스물다섯 살 차이인데 따지지 않고 ‘아우’라고 불렀어요. 취재 길에 자주 수행했고,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말하자면 벤치마킹을 한 거지요. 10년 가까이 그랬습니다. 백파 선생이 음식 맛보면서 한잔 걸치고 취하면 말씀하시는 거 제가 다 메모하고, 거기에 살을 붙여 원고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분 영향 많이 받았습니다.”

동신면가의 안주인이자 주방 사령관 김문자 여사. 겉껍질을 벗긴 메밀 녹쌀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1994년 백파의 『한국의 맛있는 집 999』 책이 나왔을 때 올림픽공원 호숫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책에 등장한 전국 향토 맛집 주인들이 100가지 음식을 차렸다. 동신의 떡갈비도 상에 올랐다. 당시 조병화(1921~2003) 예술원 부회장, 황명(1931∼1998)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 원로 예술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책에 실린 음식점 주인들은 서로 기억하고 정보를 교류하자며 다담회(多啖會)를 결성했다. 박 대표는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박 대표의 아들도 독립해 상암동에서 음식점(동신화로: 서울 마포구 매봉산로2길 25-8/전화 02-6014-8892)을 운영하며 가업 3대를 이어가고 있다. 대학에 들어가 방황하다가 군대 제대 후 외식경영학과에 다시 입학해 공부를 마치고 개업했다. 대물림 한 아들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동신면가는 음식점 앞마당이 주차장이다. ‘동신떡갈비’라는 옛 상호도 여전이 붙어있다. 꽤 넓은 주차장의 차량 관리는 박영수 대표 몫이다.

“다행이고 대견합니다. 갈비 먹을 때 나오는 고추냉이와 고추냉이잎장아찌는 아들 아이디어인데 맛있어서 제가 받았습니다. 젊은이들 감각이 빠르더라고요. 전통은 중요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전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대 변화를 언제든 반영하려고 합니다. 한 가지 뼈대는 지킬 겁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음식이 제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 DNA는 역시 이북음식입니다. 태어난 곳은 대전이지만 부모님께 물려받은 미각 유전자가 그렇습니다. 지켜가겠습니다. 등뼈가 곧으면 전신이 반듯하게 서는 것처럼 뼈대는 유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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