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용의자가 공범이거나 적어도 한 명이 범인임은 확실하다. 다른 용의자가 있을 수 없는 상황이고, 두 명 모두 상대방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이 상황에서 일반 국민들은 둘 중 더 진범일 거 같은 사람을 유죄로 판단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마치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중에 조금이라도 더 끌리는 것을 먹으면 되는 것처럼. 하지만 사법 판단의 원칙은 전혀 다르다. 각각 용의자를 따로 판단해서, 범인일 확률이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확실해야 그 용의자를 진범으로 판단한다. 사건의 성격이나 판사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좀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95% 이상의 높은 확신이 들어야 유죄를 선고한다.
그래서 이태원 살인사건은 진범이 누구든지 유죄판결이 선고되기 힘든 한계를 가지고 있다. 둘 다 범인일 가능성이 워낙 농후해서 한 명을 진범으로 판단할 95% 이상의 확신이 들기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18년 전에 에드워드가 아닌 패터슨이 먼저 살인죄로 기소됐었다면 그도 무죄로 풀려났을지 모른다. 에드워드가 범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에드워드가 이미 무죄로 확정된 상황에서 패터슨마저 무죄로 풀려난다면, 국민들의 법감정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죄형법정주의’ ‘증거재판주의’ ‘합리적 의심의 원칙’과 같은 사법원칙은 설사 나쁜 짓을 한 진범을 풀어주는 한이 있어도 억울하게 처벌받는 사람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우리 모두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로 처벌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 형사소송절차를 까다롭게 만든 것이다. 원래 나쁜 놈이었고 분명히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아무리 범죄가 성립될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 그중에 일부분만 법적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니 사법체계의 법원칙을 따라야 하는 검찰은 곤란할 수밖에 없다. 세간에는 검찰에 현 정권의 은혜를 입은 사람과 우병우 사단이 포진해 있어 수사할 의지가 없다는 의심을 받고 있지만, 굳이 그런 정의롭지 않고 치졸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검찰의 수사 결과가 국민을 만족시키기는 힘들다. 만약 지금까지처럼 항상 언론보다 한 발 늦게, 더구나 언론에서 이미 제기한 내용에 대해서만 검찰의 수사가 한정된다면 수사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100개의 나쁜 짓 중에 10개만 법적 처벌을 받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법체계의 한계라면, 검찰의 해야 할 일은 명확해진다. 1000개의 나쁜 짓을 찾아서 그중에 100개를 처벌하면 된다. 설사 처벌이 100개에서 살짝 부족해도 그들이 1000개까지 찾아낸 것을 국민이 알게 되면, 국민은 검찰을 비난하기보다는 위로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검찰은 그들이 제대로 찾아내고 있는지, 어떤 자세로 찾고 있는지를 감추기 위해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가 또 팔짱 끼고 웃고 있을지 국민이 알아서 상상하라고 한다. 지금 이렇게 힘든 국민들에게.
얼마 전 검찰의 각종 비리사건을 접했던 국민들은 검찰이 너무 강한 권력을 독점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려고 검찰에 그 권력을 줬나 자괴감이 드는 국민이 많다. 하지만 그 권력으로 언론이나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정의를 실현할 때, 국민들은 그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 조금은 관대해질 수 있다. 검찰, 지금이 바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보여줄 때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