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라 물려줘선 안 돼" 자녀 손잡고 나온 3040

중앙일보

입력 2016.11.13 04:45

수정 2016.11.1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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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12일 집회 현장에는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가족 단위 참가자들이 많았다. 엄마와 아이들이 광화문광장에 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부터 20대 후반 취업준비생, 박근혜 대통령 골수 지지자였다는 60대 노인까지. 세대·계층을 넘어선 시민들이 100만 개의 촛불에 불을 붙였다. 저마다 두 손에 촛불을 받쳐 들기까지 사연은 다양했지만 광장과 거리로 몰려든 그들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하야”라는 구호를 한목소리로 외쳤다. 1987년 6·10항쟁 이후 처음으로 100만 명이 모인 12일 촛불시위 현장에선 국민의 생생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직접 목소리 내는 게 참교육이라 생각”]
이날 집회 현장엔 수만 명의 부모가 자녀들의 손을 잡고 나와 함께 촛불을 들었다. 주부 김하정(41)씨는 서울 마포에서 남편과 초등학생인 두 아들과 함께 촛불시위에 참석했다. 초등학생 아들은 “넌 바보 멍청이, 박근혜 퇴진하라! 박근혜 사라져라! 박근혜 하야하라!”고 큰 글씨로 직접 쓴 스케치북을 가지고 있었다. 김씨는 “아이들에게 선배들이 이룬 민주화를 국민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지난주에 이어 다시 나왔다”며 “사회의 불합리한 상황을 고치기 위해 시민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는 모습 자체가 ‘참교육’이라고 생각해 참여했다”고 말했다.
김홍렬(42)·오혜신(37)씨 부부는 나영(10)·경률(7)·경린(4) 등 자녀 셋과 함께 촛불을 들었다. 막내 경린을 유모차에 태우고서였다. 김씨는 “보다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겐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에서도 상경했다. 부산에 거주하는 은행원 김태언(34)씨는 액세서리 가게를 하는 부인과 함께 오전 6시10분 KTX를 타고 일찌감치 서울광장을 찾았다. 김씨는 “아내가 지난해 초 가게를 연 후 단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었지만 이번엔 먼저 ‘서울에 가자’고 하더라. 기꺼이 아내를 따라나섰다”며 “우리 부부가 나중에 아이가 생겼을 때 지금의 나라를 물려주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노인들 “집회 간다니 자식들도 안 말려”]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지지층인 노인 부대도 대거 촛불을 들었다. 새누리당의 골수 지지자였다는 이모(65·서울 용산)씨는 “1987년 6월항쟁 때 서울 퇴계로에서 최루탄을 맞아 가며 서울시청까지 행진한 후 30년 만에 집회에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착한 국민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박근혜와 그를 비호하는 새누리당은 국민을 속이고 배신했다”며 “내 마음이 부글부글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겠더라. 너무 답답해 나왔다”고 했다.
전북 정읍에서 상경한 조남희(61)씨는 “오전 8시에 버스 2대로 상경했다”며 “벼농사를 짓는 농민으로서 쌀값이 떨어져 난리지만 이번은 국가 비상사태”라고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과 최순실, 두 여자가 나라를 아주 결딴 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국정을 가지고 놀 수 있느냐”며 “자식 둘과 며느리까지 3명이 다 공무원인데 처음으로 집회에 가겠다는 데 아무도 안 말리더라”고 덧붙였다.

[2030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한양대 간호학과 1학년 김수민(19)씨는 2014년 4·16 세월호 참사 때 숨진 단원고 2학년생들과 동갑내기다. 김씨는 “세월호뿐 아니라 어떤 사고가 나도 국가가 수습을 잘하거나 책임진 사례를 본 적이 없다”며 “그동안 정치에 관심이 없었지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고 (분노를)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왔다”고 말했다. 김씨는 “제주도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거니 ‘위험하다’고 걱정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가서 생각도 많이 하고 (앞으로) 어떻게 투표할지 고민해 보라’고 말씀하더라”고 했다.
숙명여대 생명시스템학부 1학년인 박미나(20)씨도 “박 대통령이 여성 리더에 대한 자신감을 주기는커녕 자괴감만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실망감과 분노가 크다. 새누리당에, 박근혜에게 표를 준 기성세대에게도 화가 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월호 7시간부터 모든 의혹을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안 했다고만 하지 말고 진실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얘기해야 한다”고 했다. 직장인 조상민(30)씨는 “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려 나왔다”며 “나중에 누군가 ‘그때 당시 뭐했냐’고 물어볼 때 ‘거기 광장에 있었다’며 자랑스럽게 대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김민재(28)씨는 “스펙을 많이 쌓았지만 취업에 계속 실패해 부모님께 항상 죄송스러운 마음”이라며 “인건비 낮추자고 사람은 찔끔 뽑으면서 최순실 일가에게 잘 보이려고 거액을 갖다 바쳤느냐”고 비판했다. 공무원 준비생 방승호(27)씨는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이렇게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며 “허탈감에 빠진 공시생이 많다”고 최근 노량진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 시카고에서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미(29)씨도 “외국인 친구들이 샤머니즘을 거론하며 최순실 사태에 대해 물어보는데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며 “내가 외국에서 자랑스러워했던 나라가 이런 꼴이었다니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개그우먼 김미화 “무조건 방 빼!”]
청년유니온·민달팽이유니온·청년참여연대·청년포럼 등 청년단체들은 이날 오후 2시 광화문광장에서 방송인 김제동씨의 진행으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김씨는 “헌법에는 국가원수는 내란·외환죄를 범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형사소추를 받을 수 없다고 돼 있다”며 “그러나 이 나라 대통령은 이미 내란·외환죄를 저지른 헌법 위반 사범이다”고 말했다.
이날 촛불시위에는 개그우먼 김미화씨 등 연예인들도 참여했다. 김씨는 오후 6시 무대에 올라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외치니, 내치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큰소리로 외치겠다. 내가 쓰리랑 부부를 할 때 마지막에 외치던 말이 있다. ‘무조건 방 빼!’”라고 말했다. 자신의 건물에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현수막을 걸었던 가수 이승환씨는 오후 8시 ‘하야 HEY 콘서트’를 개최했다.
정부의 청산 결정으로 무더기 해고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한진해운의 장승환(49) 육상노조 위원장도 이날 부인·딸과 함께 촛불을 들었다. 장 위원장은 “육상직원 정리도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어느 회사에 인수될지는 모르겠지만 한진해운 청산 과정의 정치적 배경을 반드시 따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의 분노의 함성이 청와대까지 들릴 정도로 힘차지만 대통령은 이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노진호·김유경·윤재영 기자
yesn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