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6시30분쯤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선 ‘아리랑목동’을 개사한 ‘하야가’가 울려 퍼졌다. 노래와 함께 촛불과 플래시를 켠 휴대전화 액정화면이 거대하게 물결쳤다. ‘말 못 타는 딸자식’ 대목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광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박근혜 하야”라는 구호가 나올 때마다 파도 치듯 촛불이 일렁거렸다. 제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군중 속에선 흥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광장은 차분했다. 욕을 하는 사람도 과격한 구호를 외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적어도 내가 있는 동안엔 그랬다. 드문드문 ‘**노동조합’, ‘**단체’의 깃발이 나부꼈지만 산처럼 무거운 광장의 진지함에 눌렸다.
사람들은 웃지도 않았지만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갓난아기를 업고 나온 신혼부부는 촛불을 들고 단상만 응시했다. 포대기를 싸 안은 손엔 “박근혜 퇴진”이라고 쓰인 팸플릿이 들려있었다. 아빠의 손에 이끌려 나온 어린 소녀는 돗자리 위에서 뒹굴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다. 접착제로 붙인 듯 딱 달라붙은 연인은 촛불 두 개를 놓고 셀카 찍기 바빴다. 목도리와 장갑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나온 촌로의 부부는 단상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길을 열어주세요.” 전국 중고생 연대 소속이라는 학생들이 길을 헤치며 단상 앞으로 향했다. 사회자가 “지금 중고생 수천 명이 광화문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군중들 뒤에선 휴지를 줍고 다니는 청년들이 보였다. 곳곳에 쓰레기봉투가 쌓여 있었다.
청와대 쪽으로 올라갔다. 세종대왕상 주변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형 스크린의 뒤편이었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경찰버스가 에워싸고 있었다. 끝이 보이질 않았다. 거대한 버스 산성이었다. 한국에 경찰버스가 이렇게 많았던가! 세종대왕 옆으로 “닭은 닭장으로”라고 쓴 깃발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킥킥대며 사진을 찍었다. 어쩌다 우리는 동물에 비견되는 대통령을 연달아 보게 됐을까.
시청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의 뒤를 무작정 따라가다 그만 갇히고 말았다. 앞으로도 뒤로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밀지도 않았다. 물이 흐르듯 떠밀려 갔다. 시청광장에선 노동자단체가 주도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사회자는 “성과급 임금제는 말도 안 됩니다”라며 “성과급 임금제를 반대한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메아리는 약했다. “철도 민영화를 중단하라!” 구호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은 광화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덕수궁 앞에선 타악기 밴드가 거리공연을 했다. 신명 나는 북소리를 따라 젊은이들은 몸을 흔들었다. 이따금 리더가 호루라기를 불면서 “박근혜 퇴진”이란 피켓을 들었다. 춤을 추던 사람들은 “와”하며 호응했다.
양초를 든 사람들에게 낯선 이들을 불을 붙여줬다. 문득 1987년 6월이 떠올랐다. 광화문 광장에 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눈물 범벅이 됐다. 을지로 쪽으로 무작정 달리던 순간. 하늘에서 하얀 물체가 눈처럼 쏟아졌다. 화장지였다. 집회를 내려다 보던 직장인들이 창문 밖으로 던져줬다. “호헌”을 외쳤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기를 든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12일 광장은 거대한 용광로와도 같았다. 갓난아기서부터 중고생과 백발의 노인까지. ‘투쟁 투쟁’이란 구호를 쓴 붉은 깃발부터 태극기까지. 머리띠를 두른 노조원에서 시위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연인까지. 진보부터 보수까지. 평소엔 물과 기름처럼 성겼을 법한 모든 걸 하나로 녹여냈다. 모든 걸 녹여버린 만큼 광장의 구호는 단순했다. “하야하라!” 대통령이 물러나고 나면 어떻게 될지 얄팍한 계산이 파고들 틈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다시 대통령과 정치권이 답할 때다. 구호는 단순할수록 무겁고 무자비하다. 얕은 잔꾀는 화를 자초할 뿐이다.
정경민 기자 jung.kyung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