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사설] 트럼프 승리로 이중 위기 빠진 대한민국

중앙일보

입력 2016.11.09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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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이 현실이 됐다. 어제 끝난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누르고 제45대 미 대통령에 당선됐다. 공직 경험이 전무한 정치 아웃사이더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된 것은 상식과 통념을 깬 대이변이다. 재벌 총수 출신으로 외설스러운 언행과 독설, 기행을 일삼아 온 트럼프가 미 합중국 최고지도자로 선출된 것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는 비교가 안 되는 대사건이다.

 ‘검은 백조(Black Swan)’ 같은 트럼프의 승리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미 유권자들의 불신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에서 밀려나고, 혜택에서 소외된 저학력·저임금 백인 근로자 계층의 쌓인 불만이 트럼프라는 ‘이단아’를 통해 혁명처럼 폭발한 양상이다. 바닥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주류 정치권과 주류 언론의 맹점 또한 고스란히 드러났다. 1인 1표에 입각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와 서구식 민주주의의 위기를 둘러싼 논쟁이 더욱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신고립주의 파장 한국에도 영향
국정의 컨트롤타워 재정비 시급
대통령 2선 후퇴가 위기 대응 출발

 클린턴의 당선을 기대했던 전 세계가 엄청난 충격과 당혹감에 휩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돼 온 미국 중심의 정치·경제 질서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세계는 앞을 가늠하기 힘든 혼돈에 빠졌다.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앞세우며 신고립주의와 보호주의적 성향을 보여 왔다.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치고,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렵다.

 특히 한국은 지금 국내 정치적으로 미증유의 위기 상황이다. 대통령의 국기 문란과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스캔들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사실상의 국정 마비 상태다.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외생 변수까지 겹치면서 한국은 말 그대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이중적 위기에 처하게 됐다.

 윤병세 외교장관은 트럼프가 당선돼도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충격 진화에 나섰지만 낙관할 일만은 아니다. 비즈니스맨 출신답게 트럼프는 동맹 관계에도 손익 교량의 잣대를 들이대며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동맹 관계를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이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나라이고, 상·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에 주류 정치인들이 포진하고 있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인식은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돼 있다. 한·미 동맹의 동요 가능성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북한 핵 문제도 걱정스럽긴 마찬가지다. 미국이 공약한 확장 억지력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경우 북한 핵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돌출적 성격을 감안하면 무력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이나 한국을 무시하고 북한과 빅딜을 시도하는 극단적 선택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질서의 판 자체가 바뀌는 상황도 상상해 볼 수 있다.

 국정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대처가 쉽지 않은 국면이지만 지금 한국은 리더십조차 공백 상황이다. 당장 누가 트럼프에게 전화를 걸지, 전화를 걸어와도 누가 받아야 할지조차 불분명하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불참 결정이 상징하듯 그게 박 대통령이 아니라는 건 국민적 컨센서스다. 국정의 컨트롤타워를 정비하는 일이 급선무인 까닭이다. 실권을 가진 책임총리를 뽑아 하루속히 내치와 외치를 포함한 모든 국정을 맡겨야 한다.

 지금은 국가적으로 비상한 상황이다. 혹시라도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외적 도전을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이중 위기를 극복하는 첫걸음은 ‘게이트’의 당사자인 박 대통령 스스로 2선 후퇴와 국정 이양 의사를 명확히 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