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지령 503호
민중 총궐기 투쟁본부가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시민 촛불’을 내걸고 주도한 이날 집회에는 투쟁본부 소속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부터 30~40대 직장인, 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의 손에는 촛불이 들려 있었고, 청계광장 곳곳에는 ‘박근혜·최순실, 이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순실봇 박근혜는 하야하라’ 같은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주최 측이 준비한 촛불 2000여 개는 일찌감치 동났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눈 촛불도 마찬가지였다. 촛불이 떨어지자 일부는 직접 가져온 LED 촛불을 켜기도 했다.
“인생 전체가 속았다는 느낌”
[최순실 국정 농단] 청계천·광화문 대규모 촛불집회
시민들은 집회를 마친 오후 7시10분부터 거리행진을 벌였다. 손에는 ‘이게 나라냐’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애초 집회 주최 측은 청계광장을 출발해 광교→보신각→종로2가→북인사마당까지 약 1.8㎞ 코스를 계획했다. 하지만 종로 일대에는 경찰의 차벽이 설치돼 광화문으로 경로를 바꿨다. 경찰은 세종문화회관과 교보빌딩 등 광화문 일대에 차벽을 치고 시위대의 행진을 막아 섰다. 이 과정에서 저지선을 뚫으려는 시위대와 경찰 간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시위대는 한목소리로 “박근혜 비켜라”고 외쳤다. 최대한 물리적 충돌을 피하겠다던 경찰은 차벽을 설치한 것에 대해 “시위대가 종로1가에서 우회한다는 원래 신고한 계획과 달리 직진을 시도해 차벽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72개 중대 6300여 명을 청계광장 인근에 배치했다. 시위대와 경찰은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을 경계로 밤늦게까지 대치했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의 방패를 빼앗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경찰은 방송을 통해 “시위대가 폭력을 행사하면 캡사이신(최루액)을 뿌리겠다”고 경고했다. 현장에 백남기씨 사망사건으로 논란에 휩싸인 살수차가 이동하자 현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사회 비판 의식 자발적 행동으로 이어져”
이처럼 다양한 배경의 시민이 참여한 데에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2002년), 세월호 침몰사고 원인 규명 집회(2014년) 등 과거의 주요 시위처럼 대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정서적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최씨의 국정 개입 규탄 촛불집회를 비롯한) 이들 시위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나선 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이번 집회에선 ‘뚜렷한 주도 세력’이 눈에 띄지 않는다. 촛불집회가 열린 이날도 집회 취지에 공감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의견이 많았다. 트위터리안 ‘만큼’(@myh0818)은 “정부 규탄 행사에 제대로 참석한 적이 없어 늘 안타까웠고 다른 시민들에게 빚지는 기분이었다. 빚 갚으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는 이날 촛불집회와 관련된 검색어가 눈에 띄었다. 이른 오후부터 ‘촛불집회’ ‘세월호 7시간’ 등의 검색어가 꾸준히 오르내렸다.
앞서 이날 집회 전 잇따라 시국선언을 발표했던 대학가의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한총련(한국학생총학생회연합),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등 학생운동단체가 이끌었던 과거 대학가 시국선언이나 집회·시위와 달리 각 대학은 자발적으로 시국선언을 하고 집회에 나왔다. 최씨 딸 정유라(20)씨의 입학·학사 특혜 의혹을 받는 이화여대, 박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 학생들이 지난 26일 시국선언을 시작했고, 27일엔 한양대·KAIST 총학생회가 시국선언을 이어갔다. 촛불집회가 열린 이날에도 충북대에 ‘박근혜-최순실 정부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우주의 기운을 담아, 꼭두각시 대통령은 물러나라’ 등의 대자보가 곳곳에 걸렸다. 한국교원대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긴급 대책위를 꾸리고 시국선언을 준비하고 있다.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련해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현재 대학생은 고교에 다니며 자신의 또래가 생명을 잃었던 세월호 참사(2014년 4월)를 지켜본 세대”라며 “이들의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자발적인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기존 학생 운동단체는 정치색이 짙어서 20대의 다양한 목소리를 모으는 데 한계가 있었다”며 “이번 사태는 (입시 비리 등) 학생들이 공통으로 느낄 만한 위기의식을 자극해 학생들의 주도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교수들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27일 경북대 교수 88명이 ‘박근혜 하야 촉구 시국선언문’을 내놨고, 성균관대 교수 32명도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더 이상의 사회 혼란과 국격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대통령은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을 전부 사퇴시키고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등 주요 대학 교수들도 시국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서 제주까지, 전국 곳곳 동시 집회
조진형·김나한 기자, 이우연 인턴기자 enish@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