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장이나 산업 유산을 예술 공간으로 바꾸는 건 이처럼 해외에선 흔한 일이다. 아시아의 문화강국을 꿈꾸는 우리나라도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까? 2016 부산비엔날레 현장을 다녀온 이들이 ‘F1963’(고려제강 수영공장)을 그 희망으로 꼽기 시작했다. 예술적인 공간일 뿐만 아니라 비엔날레 개최 장소로서 많은 이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고 있다는 평이 잇따른다.
쇳가루 날리던 철강 공장이 비엔날레 전시장으로
부산을 대표할 문화예술 공간 F1963
F1963이라는 이 걸작은 ‘버려진 공장을 예술적인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의 제안을 접수한 서병수 부산시장이 홍영철(68) 고려제강 회장을 만나 성사시켰다. 창사 71년 역사에 빛나는 고려제강이 문화도시로 성장하고자 하는 부산시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부산비엔날레 전시감독을 맡은 윤재갑(48) 중국 하우아트뮤지엄 관장은 “이번 비엔날레가 F1963을 부산의 핵심 문화예술지대로 만들어가는 첫 걸음”이라고 강조했다.
‘F1963’에서 전시 중인 부산비엔날레 ‘프로젝트2’는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이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전통과 현대, 인간과 자연, 동양과 서양, 아날로그와 디지털, 자본과 기술의 혼혈로 만들어진 현시대를 성찰하고, 모든 가능성을 논의해보자는 취지다. 중국의 팡뤼쥔 등 23개국 작가 56명(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화이트큐브(4각의 흰색공간)를 벗어난 영상, 설치, 회화 작품들이 많다. 몇 가지 인상적인 작품들을 만나보자.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 작품을 만든 작가의 인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폴란드 출신 작가 조아나 라이코프스카의 영상 작품 은 작품 제목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만진 적이 한번도 없었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무너진 관계와 회복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로 수송되던 중 탈출한 아픈 과거가 있다. 아버지는 그때의 상처 때문인지 가정을 꾸린 뒤에도 평생 가족으로부터, 심지어 아내를 떠나보내는 순간까지도 늘 도망치는 삶을 살았다. 그는 한 번도 어린 자식의 기저귀를 갈아준다거나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여하거나, 심지어 패혈증으로 그녀가 입원을 했을 때조차도 곁에 없었다.
작가는 작품을 위해(실제로는 자신과 아버지의 화해와 치유를 위해) 아버지가 그녀의 얼굴을 만져줄 것을 요청한다. 그것은 어쩌면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었을지 모른다. 10분여의 비디오 영상에서는 아버지와 딸이 눈을 감고 서로의 얼굴을 손으로 터치하다가 어루만지고 교감한다. 아우슈비츠로부터의 도피가 평생의 상처가 되어 가족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던 아버지가 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얼굴의 표정이 변화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냥 보고 지나치면 연인으로 오해될 수 있는 실험적 영상작품으로 보이지만 작가의 이같은 스토리를 알고 작품을 감상하면 관객도 함께 힐링하는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맨 위 사진)
중국 작가 리우신이의 <세계의 중심>은 현대예술의 핵심적 요소인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영상 작품이다. 처음엔 관객들에겐 이 작품이 지도책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컬러풀한 세계 지도가 아주 천천히 눈 앞에서 움직인다. 움직이는 지도에 눈길이 가는 순간 지도의 배경이 종이가 아니라 사람의 피부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지도의 배경은 당혹스럽겠지만 사람의 갈라진 엉덩이다.
증강현실 앱을 활용한 신체 예술 작품도
작가는 세계 지도가 자전(自轉)하는 형식을 인체의 엉덩이에 투영함으로써 세계의 중심을 인간 배설물의 출구가 되도록 표현한다. 결국 절대적인 세계의 중심은 없다는 것을 작가는 해학적으로 나타낸다.
프랑스 작가 오를랑은 신체를 작업의 재료이자 시각적 지지대로 만든다. 자신의 신체 자체를 토론장으로 사용하고 전시한다. 오를랑은 데이터를 끊임없이 변화시켜 관습과 ‘레디메이드’ 사고를 무너뜨린다. 사회적 통념은 물론 자연적 결정론, 남성 우월주의, 종교, 문화적 분리, 인종차별 등의 지배적인 유형에 반대한다. 오를랑 작가의 작품에서는 바로크 시대의 여성의 신체 묘사,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의 인도, 중국의 문화 탐색 등 가상적인 현실을 가장 현대적인 과학, 생물학 그리고 컴퓨터 기술로 살피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작가의 최신 연작 (2014)에서 오를랑은 베이징오페라의 가면을 인터랙티브 기술에 접목하여 작품으로 풀어내고 있다. 증강현실 앱 ‘오그먼트(Augument)’를 활용해 자기 교배(selfhybridization) 와 모든 소스들이 QR코드로 변한다. 전시 현장에서는 관람객의 태블릿과 스마트폰에 오를랑의 아바타가 출연해 여성에게는 금지되었던 베이징오페라에서 곡예를 선보인다. 관람객들은 이 3D 아바타와 함께 사진 촬영도 할 수 있다.
특히 중국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장샤오강의 <대가족>시리즈는 회색빛의 어두운 화면에 억압된 개인과 역사를, 혁명 시기의 도식화된 초상화같은 가족 이미지로 구성한 작품으로 국내 미술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명작이다. 부산비엔날레의 프로젝트 1과 2는 전시 장소도 다르고 전시 성격도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부산비엔날레를 즐길 수 있다.
나권일 기자 na.kwoni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