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권이 총체적인 무기력증에 빠졌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충분한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수익의 질을 진단할 수 있는 대표적 지표인 ROA와 자기자본이익률(ROE)을 점검해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쉽게 알 수 있다. ROE는 투입한 자기자본으로 얼마의 이익을 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100원 굴려 0.17원 벌어 … 5~10년 후 장담 못 해
외국 금융사에 ROA·ROE 크게 뒤져…
파괴적 혁신, 과감한 투자, 글로벌 진출 필수
은행 수익성 지표 2003년 수준 뒷걸음질
ROE도 마찬가지였다. 2005년 18.42%로 최고봉에 등극한 후 서서히 하락하더니 지난해 2.08%로 추락했다. 올 상반기에도 2.3%로 지난해와 비교할 때 도낀개낀이다. 2분기만 놓고 보면 ROA와 마찬가지로 마이너스(-1.07%) 신세다. 곧 따라잡을 것처럼 보였던 외국의 은행들은 그동안 더 멀리 도망갔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5년 현재 미국 상업은행의 평균 ROA는 1.04%, ROE는 9.26%다. 국내 은행들보다 ROA는 10배 가까이 높고, ROE도 4배 이상 높다. 물론 국내 은행 평균 지표들은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태생적으로 적자를 면키 어려운 국책 특수은행들이 모두 갉아먹고 있다는 변명도 가능하다.
하지만 상위 시중은행들 역시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 5월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국제은행 통계사이트 뱅크스코프(Bankscope)의 자료를 분석해 정리한 2015년 기준 세계 100대 은행 보고서를 보자. 이 명단에 포함된 한국의 은행들은 KB금융·신한지주·하나금융·우리은행·농협·기업은행 등 6곳이다. 은행의 국적별 순위로 따져보면 미국(20개)·중국(10개)에 이어 캐나다와 함께 공동 3위에 해당한다. 수익성 지표를 비교해보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한국의 6개 은행 평균 ROA는 0.43%, ROE는 5.56%에 그쳤다. 이에 반해 세계 10대 은행의 ROA는 1.05%에 달했다. 글로벌 100대 은행으로 범위를 넓혀도 평균 ROA가 0.75%로 한국 은행들에 비해 크게 높았다. 세계 상위 10대 은행의 평균 ROE도 11.6%로 국내 6개 은행 평균의 2배 수준이다. 국내 은행 전체 평균 ROE와 비교하면 5배 수준에 가깝다. 보고서를 작성한 정희수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한국계 은행의 수익성 지표는 외국 동일 그룹 은행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전 세계 곳곳에 진출해있는 씨티은행의 각국 지점 간 ROA 비교 결과도 민망하다. 씨티은행이 진출한 아시아 18개국의 ROA가 평균 1.4%인데, 한국 씨티은행의 ROA는 0.4%에 불과하다.
다른 업권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10년 5.46%까지 올랐던 국내 카드사 ROA는 올 상반기 2.04%로 내려왔고, 카드사 ROE도 같은 기간 19.77%에서 7.83%로 추락했다. 해외 카드사 중 국내 카드사들과 비슷한 영업 구조를 갖고 있는 아메리칸익스프레스카드의 경우 지난해 ROA가 3.2%, ROE가 24.5%로 국내 업체들과 큰 격차를 보였다. 올해 상반기 보험사 ROA는 0.89%로 지난해 같은 기간(1.01%)보다 0.12%포인트 떨어졌다. ROE도 전년 동기(10.20%)보다 하락한 8.68%였다. 특히 생보사의 경우 ROA와 ROE가 각각 0.62%, 6.77%로 전년보다 0.21%포인트와 2.54%포인트 하락했다. 대 호황기였던 지난해 상반기에 0.98%로 치솟아 올랐던 국내 증권사 ROA도 올 상반기에는 0.64%로 고꾸라졌다.
한국 금융시장 성숙도 138개국 중 87위
국제 비교에서도 한국 금융의 현실은 쉽게 확인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올해 5월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를 보면 한국의 금융 부문은 전체 61개국 가운데 37위에 그쳤다. 작년보다도 6단계 하락한 순위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최근 세계 138개국의 국가경쟁력을 평가한 결과를 봐도 한국의 금융시장 성숙도는 87위에 불과했다.
돈을 벌지 못하니 고용 측면의 기여도 미미하다. 금융연구원이 내놓은 ‘2015년 금융인력 기초통계 분석 및 수급전황’에 따르면 지난해 총 1338개 금융회사에 고용된 인력은 28만5029명으로 집계됐다. 2년 전에만 해도 29만명 수준이었지만 은행과 보험사, 증권·선물사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보험업에서 1502개, 증권·선물업에서 1684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2014년과 2015년의 전체 산업 취업자수는 각각 2.1%와 1.1% 증가한 반면, 금융·보험업 취업자수는 각각 3.1%와 5.9% 감소했다. 2015년 전 산업의 일자리 창출 기여도는 1.05%였던 반면, 금융·보험업 기여도는 -0.19%였다. 전 년의 -0.11%에 이어 2년 연속 마이너스다.
더 큰 문제는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는 사실이다. 은행의 경우 저금리 지속으로 예금과 대출 금리의 격차인 예대마진이 줄어들면서 위기에 봉착한 상태다. 그렇다고 수수료 등 비이자 부문에서 수익을 창출하기도 어렵다. 수수료 인상에 대한 금융소비자의 반감이 큰데다 자체 경쟁도 워낙 치열하기 때문이다.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은 10월 8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체 수익에서 수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과 일본은 30~40%인데 반해 한국은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탄했다.
새 회계기준 적용 땐 보험업 뿌리 흔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 금융업 존망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동우 신한금융그룹 회장은 올 초 강연에서 금융업의 위기 상황을 잉카제국의 멸망에 빗댔다. 그는 “고작 168명의 스페인 군에 의해 8만 명의 군대와 10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거느린 거대한 잉카제국이 멸망했다”며 “스페인군과 함께 상륙한 천연두와 흑사병 등 새로운 질병, 양 세력 간 무기의 차이, 외부와의 교류가 없었던 잉카제국의 폐쇄성 등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처럼 신속한 변화에 대한 대응이나 글로벌한 시각이 없다면 핀테크 등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직면한 금융업의 미래 역시 안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혁신이 답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취임사에서 “우리 금융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획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며 “변화는 어렵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임 위원장이 내놓은 구체적 개혁 실천방안은 자율과 경쟁의 확대, 자본시장의 활성화, 핀테크와 해외 진출 등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 금융시장 안정성 제고였다.
금융권 판도 뒤흔들 인터넷 전문은행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 금융인들에게는 혁신의 경험이 많지 않다. 한 대형 시중은행 고위 인사는 최근 사석에서 “금융위원회가 올 초 은행의 일임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운용을 허용했을 때 은행권은 수류탄을 하나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았다”며 “은행은 태생적으로 경쟁을 싫어하고, 투자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권한을 손에 쥐어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변화의 조짐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고인 물이었던 금융권에는 오랜만에 기존 ‘미꾸라지’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메기’가 등장할 판이다. 인터넷전문은행인 카카오뱅크와 K뱅크의 등장은 기존 금융권의 판도를 뒤흔들 중요 변수다. 지분 매각 작업의 첫 단추를 잘 꿴 ‘민영 우리은행’의 탄생 역시 기존 플레이어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다. 통합 미래에셋증권의 등장은 은행 일임형 ISA의 등장과 함께 한국 금융의 중심축을 은행에서 대형 IB로 옮아가게 만들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와 미래에셋증권의 결합으로 11월 탄생하는 통합 미래에셋증권은 자산 규모 8조원의, 압도적인 증권 업계 1위 기업으로 우뚝서게 된다. 이미 증권 업계는 KB투자증권과 현대증권의 결합 등 업체 대형화의 움직임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보험 업계와 카드 업계도 신상품을 속속 내놓는 등 나름대로의 활로 모색에 분주한 상황이다. 임종룡 위원장은 “변화와 위기를 예측하고 적극적으로 미래 금융에 대비한다면 한국 금융도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모두가 아프리카 들소인 누우가 되어야 한다는 게 임 위원장이 내놓은 성공의 전제 조건이다. 누우는 사자와 악어의 습격으로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건기가 되면 어김없이 새로운 초원을 찾아 수백㎞ 이상의 대이동을 감행한다. 한국 금융권이 누우처럼 꾸준히 전진해 마침내 금융개혁을 이뤄낼지, 아니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외부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잉카제국처럼 주저앉고 말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