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선은 ‘단종애사’와 현대 도시의 일상에 매몰된 군중 그림으로 주목받아 왔다. 얼핏 별 관계없는 주제처럼 보이지만 저 애처로우면서도 비극적인 역사와 이 무기력하고도 갑갑한 일상은 결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것은 꽃 때문이고, 꽃이 피는 것은 잎과 가지 때문이며, 잎과 가지가 뻗은 것은 뿌리 때문이다. 서용선은 무엇보다 이 뿌리를 통찰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렇게 시류를 거슬러 원초를 궁구해야 세상이 왜 이렇게 흐르고 그 자신이 왜 여기 서 있는지 어렴풋하게라도 감이 잡히기 때문이다.
‘색과 공-서용선전’
그의 변에 따르면 오랫동안 숙제였던 자신에게 미친 불교의 영향을 표현하려고 이런 작품을 제작하게 됐다고 한다. 이는 자신을 해부하는 일이자 한국인 전체를 해부하는 일이다. 서구적 가치에 익숙한 오늘의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한국인이라면 불교의 영향을 떼어놓고 그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이때의 불교는 단순한 종교라기보다 정신의 원류다. 우리 정신과 정서의 근원이 뭘까, 서용선은 그게 궁금했고, 그로 인해 이렇듯 파헤침의 칼과 붓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애초에 원시불교에는 불상이 없었다고 한다. 알렉산더의 인도 원정 이후 그리스 조각 전통과 불자들의 형상에 대한 열망이 만나 탄생한 게 불상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불상 자체가 애초부터 그리스라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에 의해 이미 완결된 이미지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서용선이 표현한 붓다와 보살들은 매우 원시적인 형상을 지녀 거칠고 투박하기 짝이 없다. 그런 만큼 고대의 불상이 원초의 에너지를 가두는 느낌을 주는 반면 서용선이 만든 현대의 불상은 원초의 에너지를 분출하는 느낌을 준다.
때로 역사의 진실은 차가운 기록보다 뜨거운 정서의 기억으로 전해진다. 서용선은 우리의 집단 무의식, 그리고 우리의 몸과 감정이 전해주는 불교적 가치를 거칠고 투박한 형상으로 표현했다. 그가 강렬한 원색으로 ‘단종애사’를 그린 것도 단순한 기록으로는 전할 수 없는 한민족 내면의 광범위한 정서적 반응과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서용선은 그처럼 보이지 않는 우리 몸과 정서의 기억을 그린다. 그렇게 원초의 진실을 되살린다.
이주헌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