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통행식 의사소통 방식 고수해 불신·불안감 증폭
고맥락·저맥락 사회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소개한 개념이다. 고맥락 사회의 구성원들은 오랜 기간 같은 역사를 공유해왔다. 굳이 많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상황을 이해한다. “원인을 조사 중”이라는 한마디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 소비자들은 이렇게 이해했을 수 있다. ‘삼성전자가 일류 기업답게 신속히 사고 조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 기다려보자.’ 하지만 미국의 소비자들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니, 처음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만 있다는 거야. 원인이 밝혀지지 않으면 왜 밝혀지지 않는지, 그 기간 동안 스마트폰은 어떻게 사용하라든지에 대한 설명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도요타 리콜, 애플 안테나 결함 때 최고 책임자 전면에 나서…
속도 제일주의 조직문화 헛점도 드러나
사태를 해명하고 수습 방안을 설명하기에 앞서 소비자의 불안을 달래는 감정적 의사소통도 필요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프랑스 광고회사 하바스에서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을 총괄하는 이브스 로버트 폴 대표는 최근 AFP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의 9월 리콜 발표는 모든 감정을 배제한 실용적인 대응이었을 뿐”이라며 “사건을 산업적 재해로 대했을 뿐 소비자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위기상황에서 리더가 전면에 나서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미국 사회에선 삼성전자의 특정인이 이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지 않는 상황도 의아하게 여기는 대목이다. 미국 경제뉴스 채널 CNBC에서 한 패널은 “누구나 애플엔 팀 쿡이 있다는 걸 아는데, 누가 삼성전자를 대변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 등이 이번 사태를 두고 ‘이재용 부회장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표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빌 조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CNBC에 출연해 “이 부회장이 미국 소비자들에게 공개 사과하고 미국 의회에 출석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폴크스바겐 같은 오류를 범해 삼성이라는 훌륭한 브랜드를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미국 기업에서 이런 품질 문제가 불거질 땐 거의 예외 없이 최고경영자(CEO)가 사태 해명에 나선다. 바비 인형으로 유명한 장난감 회사 마텔의 2008년 납 성분 검출 파동이 좋은 예다. 로버트 애커트 CEO는 직접 방송 뉴스에 출연해 어떻게 장난감을 수거할 것인지 설명했다. 또 다시는 납 성분이 장난감에 들어가지 않도록 3단계 조치를 추가했다고 소개하며 사과했다. 4명의 일가족이 숨진 사고를 야기한 도요타의 렉서스 급발진 사고 역시 6개월의 공방 끝에 도요타 아키오 사장이 직접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눈물을 흘리며 사죄한 후에야 소비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애플의 아이폰4에서 안테나를 특정 각도로 잡으면 수신률이 떨어진다는 결함이 발견되자 기자회견에 나선 이도 스티브 잡스 당시 CEO였다.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는 “노트7과 관련해 삼성전자를 비판하는 이들은 노트7에 결함이 발견됐다는 사실 자체보다 소비자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 삼성전자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데 주목한다”며 “정서적인 반감을 잠재우려면 최고 책임자가 전면에 나서 사태를 수습하는 게 최선”이라고 조언했다.
수평적 조직문화 정착은 요원한 과제
이재용 부회장은 올 3월 ‘스타트업 컬처 혁신 선포식’을 열 정도로 수평적 조직문화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성과주의, 속도 제일주의가 남아있는 한 삼성전자 조직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을 거란 지적이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그동안 그룹 계열사의 사업구조 개편에 주력했던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좀 더 챙겨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라고 말했다.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