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는 1948년 건국 이후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와의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리던 시절, 팔레스타인 자치를 수용하는 ‘오슬로 협정’을 주도해 평화의 씨앗을 심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국토 면적의 5분의1 정도인 작고 가진 것 없는 이스라엘이 세계적인 ‘창업국가’로 우뚝 설 수 있는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대통령 퇴임 후에도 16㎡(4.8평)짜리 사무실에서 젊은 창업자들의 멘토 역할에 여생을 쏟았다. 장관·총리·대통령을 지내며 쌓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투자자와 벤처기업을 이어주고, 손자뻘 되는 젊은이들의 창업을 뒷바라지해 90세가 넘는 나이에도 ‘청년 대통령’이라 불렸다. 페레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노년층뿐만 아니라 젊은이들까지 모두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이유다.
창업국가 초석 다진 페레스 애도 물결
푸른 지중해와 맞닿아 있는 텔아비브(Tel aviv)는 연중 화창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히브리어로 ‘봄의 언덕’이란 뜻을 가진 이스라엘의 경제 중심지 텔아비브는 그 이름처럼 ‘잘 살아보자’는 유대인의 희망이 담긴 곳이다. 이스라엘 5000개 스타트업(창업 초기 신생기업) 중 1450개가 텔아비브에 있다. 1㎢당 스타트업 28개, 인구 290명 당 1개의 스타트업이 있는 꼴이다. 이스라엘이 창업국가라면 텔아비브는 명실상부 ‘창업도시’다.
매년 9월이 되면 텔아비브 거리는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찬다. 술이나 춤 대신 아이디어와 정보가 넘실대는 ‘DLD 텔아비브’ 축제 덕분이다. 이 행사는 이스라엘의 디지털 혁신과 창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열린다. 수백 개의 스타트업들은 자신들의 잠재력을 뽐내고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은 최첨단 기술을 전시하는 동시에 최신 아이디어 사냥에 나선다. 벤처캐피털과 에인절투자자들은 ‘돈이 될 만한’ 투자처를 물색한다. 정·재계 인사들은 기업의 애로사항을 듣고 이를 제도에 반영하려 애쓴다. 말 그대로 ‘창업 생태계(eco system)’를 이루는 핵심 주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긴밀히 교류하는 ‘하이테크 허브’인 셈이다.
9월 27일(현지시간) 주요 행사가 열린 텔아비브 ‘하타차나 컴파운드’. 아침부터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더위에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햇살이 눈부셨다. 론 훌다이 텔아이브 시장은 “내 꿈은 하나다. 텔아비브를 세계의 창의적인 사람들이 와서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드는 것”이라며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수많은 참가자가 자유롭게 기업 전시관과 스타트업 부스를 넘나들며 증강현실(AR)·가상현실(VR)·사물인터넷(IoT)·드론 등과 관련한 다양한 첨단 기술을 체험하고 궁금증을 질문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나스닥 상장기업 수 미국>중국>이스라엘 순
‘하이테크 창업강국’ 이스라엘은 크게 3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간다. 첫째, 군대다. 이스라엘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 간 의무 복무를 하는데 이 기간 동안 창업의 핵심 자질인 리더십과 팀워크, 위기상황 돌파 능력 등을 익힌다. 이게 이스라엘 IT창업의 기틀이 됐다. 특히 영재 군사교육 과정인 ‘탈피오트(Talpiot, 최고 중의 최고)’를 통해 매년 최상위권 고교 졸업생들이 선발되는데, 이들은 명문 히브루대에서 3년 간 수학과 물리학,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다. 이들은 대부분 하이테크 벤처기업가로 변신한다. 매출 1조7000억원에 이르는 세계적인 사이버 보안업체 체크포인트를 세운 길 슈웨드 회장은 “군 복무기간 맡았던 임무에서 보안 아이디어를 얻어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말했다. 스무살 이전에 경험한 첨단 군사기술과 과학 속에서 젊은이들은 관심 전공을 정하고 단련해 창업의 기반을 닦는 것이다.
둘째, 창업 에코시스템이다. 특이한 것은 정부의 역할이 크면서도 철저하게 민간 중심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28개 부 중 13개 부에 수석 과학관실(Office of Chief Scientist)을 두고 있다. 각 부처마다 대학들과 해당 업무에 관련된 연구개발(R&D)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OCS는 가장 민감한 ‘돈 문제’를 해결해 준다. 우선 ‘트누파’란 프로그램을 통해 창업 전 필요한 자금의 85%를 지원해 준다. 창업이 성공하면 매출액의 3%씩 상환해야 하지만 실패하면 갚지 않아도 된다. 나머지 자금 15%는 창업 초기 각종 지원을 담당하는 인큐베이터가 맡는다. 벤처캐피털 주도의 컨소시엄으로 이뤄진 인큐베이터들은 스타트업의 지분 30~50%를 받는 조건으로 투자금을 제공한다.
과감하게 도전하는 정신 높이 평가
이런 제도와 분위기가 낳은 셋째 톱니바퀴가 바로 ‘후츠파(chutzpa)’ 정신이다. ‘당돌함’ 정도로 해석되는데 ‘두려움을 모르는 도전정신’ ‘할 말은 하는 문화’ ‘실패해도 괜찮아(OK to Fail)’ ‘새로운 해결책을 찾고자 끊임없이 질문하기’ 등의 말을 모두 합쳐 놓은 의미다. 이스라엘 일각에선 ‘후츠파가 지나쳐 기술이나 지식도 없으면서 자신감 하나로 창업에 달려드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는 우려까지 나오지만 무에서 유를 창출해야 하는 창업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자질임은 틀림없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생전에 “우리가 끝까지 지켜내야 할 태도는 과감하게 도전하는 정신”이라고 역설했던 ‘창업국가의 아버지’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의 유지(遺志)를 오늘도 지켜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