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창무회를 만들었나.
- “이화여대 무용과 3학년때로 기억한다. 서울시민회관에서 미국 흑인 무용수 엘빈 에일리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보면서 눈물이 났다. 자기를 드러내며 꿈틀거리는 몸짓이 내가 추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때까지 난 예쁘게만 췄다. 아니 그렇게 배웠다. 따로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무당과 굿 등 무속, 불교제례 등을 하나씩 익혀갔다. 그저 아름다운 게 아닌, 우리네 삶을 표현하고자 했다.”
- 맨발로 춤을 춘 이유는.
- “70년대까지 한국춤이라면 의례 한복 입고 버선 신고 추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버선을 신을 수 있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었을까. 귀족만을 위해 복무하는 게 예술은 아니다. 많은 이들의 일상을 담아내는, 생활에서 기반한 몸짓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우리 민족에게 땅이란 어머니처럼 푸근한 존재 아닌가. 땅과 밀착하기 위해서, 온전히 한 몸이 되기 위해서도 맨발을 택했다.”
- 무용전문지 ‘몸’도 발행하고 있는데.
- “이론적 토대가 없으면 춤도 없다는 철학이다. 이른바 ‘춤의 지성화’다. 창무회가 출범할 때만 해도 왜 이렇게 춰야 하는지, 어떤 동작을 하는 게 맞는지 등 모든 분야에 기본이 없었다. 그래서 춤 동작을 연습하는 것만큼 그 뿌리는 어디서 비롯됐는지도 열심히 파고들었다. 그 일환으로 무용전문지 ‘몸’을 매달 발간하고 있다. 22년 됐다. 나올 때마다 수백만원씩 적자다. 다들 그만두라는데, 도저히 포기 못하겠더라. 팔자려니 생각한다. 11월부터 웹진으로 운영한다.”
- 춤의 세계화에도 앞장 섰다.
- “84년 미국 최고 권위의 『댄스매거진』 표지 모델을 했다. 아시아인 최초다. 2006년엔 프랑스 리옹 ‘메종 드 라 당스’에 한국인 최초로 섰다. 지금껏 해외 100여개 도시에서 400여회 공연했다. 난 개런티 받고 외국 나갔다. 그들이 왜 나를 부르겠나. 내 것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꿀리지 않았다.” (2011년 일본 교토조형예술대학에선 김매자 춤을 집중 연구하는 심포지엄도 열렸다.)
그에게 두 딸이 있다. 그 중 작은 딸이 지난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딸은 자폐증이 있었다. “임신했을 때도 복대 꽉 차고 연습했어. 그래서 아이가 그런 게 아니었을까 평생 죄스럽더라고.” 장애가 있는 딸을 어머니는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공연장에서 모녀가 있는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수록 증세가 심해졌어. 대소변을 못 보고, 거칠어지고…. 40여년 고생만 했는데, 좋은 데 갔을 거야.” 그는 딸을 잃고도 6일 뒤 무대에 올라야 했다.
- 이번에도 공연을 하는지.
- “물론이다. 12월27일 ‘춤본-하늘·땅·인간’이란 작품을 선보인다. 지금도 스트레칭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춤은 속일 수 없다.”
글=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