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코는 1998년 기계식 GS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201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올해 신모델 중에는 50만엔(약 540만원)이 넘는 것도 등장했다. 핫토리 신지 세이코 CEO는 “GS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겠다”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기계식으로의 회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세이코만이 아니다. 시티즌 홀딩스(이하 시티즌)도 올해 스위스의 최고급 시계 브랜드인 프레드릭 콘스탄트(이하 FC)를 인수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시티즌, 스위스 최고급 시계 프레드릭 콘스탄트 인수
쿼츠 중심이던 세이코, 브랜드 가치 높이려 사활 ... 시티즌은 M&A로 멀티브랜드 전략
일본 시장과는 대조적으로 스위스 시계 업체들은 과반수가 도산에 직면했다. 그런 스위스 시계 업계가 부활하는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 스와치그룹이다. 1983년 ‘오메가’나 ‘해밀턴’을 중심으로 한 SSIH(시계산업스위스협회)와 ‘론진’을 중심으로 한 ASUAG(스위스시계산업연합)가 합병해 스와치그룹의 전신인 SMH가 탄생했다. 같은 해에 쿼츠 시계 ‘스와치’가 발매된 것도 큰 몫을 했다. 스와치는 독특한 디자인과 솔깃한 한정 모델 전략을 앞세워 세계적인 인기 시리즈가 됐다. 스와치그룹은 성공 자금을 토대로 ‘블랑팡’이나 ‘브레게’ 같은 기계식 브랜드를 잇따라 인수했고, 대대적인 광고 공세와 함께 기계식 시계의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렸다.
해외 시장서 ‘1000달러의 벽’ 공략하는 게 관건
또한 외부 전파를 수신해 시각 오차를 자동 보정하는 전파시계를 개발했다. 2003년 시티즌이 세계 최초로 풀메탈 전파시계를 발매했을 당시 사내에서는 5만엔(약 54만원)이라는 가격 설정에 대해 ‘이렇게 비싼 시계가 팔릴 리가 없다’고 비관적인 의견이 강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크게 히트했다. 이듬해 세이코도 추격했지만 가격 파괴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오카자키 유 노무라증권 연구원은 “기술의 진화를 브랜드 가치 향상에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2012년엔 세이코가 세계 최초로 위성항법장치(GPS) 태양전지 손목시계를 발매했다. GPS를 통해 얻은 정보로 시각 오차를 보정하고 세계 어디에서나 정확한 시간을 표시할 수 있게 됐다. 19만엔이라는 비싼 가격에도 이 또한 크게 히트했다. 2014년 시티즌도 GPS 대응 제품을 투입했다. 지금까지 양사 모두 20만엔이 넘는 모델을 판매 중이다.
신기술이 사업을 이끌며 단가 상승과 수익 개선을 동시에 이뤄낸 일본 브랜드. 하지만 ‘외부로부터 얻은 정보로 시각을 보정’하는 기술 진화는 이제 한물갔다. 향후 성장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시계 시장의 핵심인 기계식 시계다. 과제는 해외 시장에서 ‘1000달러(약 110만원)의 벽’을 어떻게 공략하느냐다. 1000달러 이상의 고가 시계시장을 봤을 때 세이코와 시티즌은 일본에서는 선전하고 있지만 해외에서는 스위스 시계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다. 손목시계 저널리스트인 나미키 코이치 도인요코하마대학 교수는 “여전히 ‘일본 브랜드=쿼츠’라는 인상이 강해, 시계를 단순한 공업 제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위스 브랜드들도 아킬레스건은 있다. 무브먼트 공급을 둘러싼 대립이다. 스위스 시계 업체 중 무브먼트를 개발·생산하는 기업은 드물다. 대부분 외부에서 사들인 무브먼트를 가공해 자사 제품으로 만들어낸다. 그 공급처 중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에타(ETA)다. 에타는 오래 전부터 스위스 시계 제조 업체에 무브먼트를 공급해왔다. 쿼츠 등장에 따른 재편 과정에서 스와치그룹에 인수된 에타는 이후에도 계속 공급을 해나갔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스와치그룹의 태도가 달라지면서 2002년 ‘2010년 부품 공급 정지를 위해 단계적으로 공급을 줄여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업체들은 맹렬하게 반발했다. 스위스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서면서 문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2013년 스와치그룹과 공정거래위원회 사이에 ‘2020년 이후는 공급 의무가 없어진다’는 취지의 협의 내용이 승인되면서 다시 논란이 확산됐다. 당장은 중국 시장 침체에 따른 시계 업계의 불황으로 스와치그룹의 태도가 누그러져 어느 정도 진정된 상황이지만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기술력과 생산체계 장점 살리면 가능성 충분
그러나 아직 스위스의 뒷모습은 멀기만 하다. 세이코와 시티즌은 각각 정반대의 전략으로 스위스를 따라잡으려 하고 있다. 시티즌은 인수합병(M&A)을 통한 멀티브랜드 전략을 취한다. 도쿠라 토시오 사장은 “시티즌 브랜드 하나만 가지고 다양한 가격대를 공략하는 것은 무리”라며 “해외에서 시티즌은 300~1000달러대 브랜드라고 인식돼 1000달러 이상 가격대에서 승부하려면 멀티브랜드 전략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티즌은 2008년 이미 미국 부로바(BULOVA)를 288억엔(약 3000억원)에 인수했다. 부로바는 아폴로 계획 당시 달 탐사기기에 채용된 것으로 유명한 브랜드다. 10만엔 이하의 가격대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높은 인지도와 강력한 판로를 갖고 있다. 이 M&A로 시티즌은 미국 중가격대 시장에서 점유율 1위가 됐다. 2012년에는 스위스 프로서(Prothor)를 품에 안았다. 프로서는 산하에 무브먼트 업체인 라주페레를 두고 있다. 고급 시계의 확대를 미리 내다보고 고품질의 무브먼트 기술을 확보했다. 일단 판로나 생산 과정을 정비했지만 브랜드 파워가 부족했다. 이를 보완하고자 FC를 인수한 것이다. 인수 금액은 130억엔. FC는 1988년 설립한 브랜드로 역사는 짧지만 무브먼트를 처음부터 생산하는 기술력을 무기로 40만~50만 엔의 중가격대 시장에서 세력을 확대 중이다.
유통 채널 다양한 유럽 시장 공략이 관건
세이코는 자체 브랜드 육성에 힘을 쏟는 모양새다. 2004년 쿼츠와 기계식을 융합시킨 독자 무브먼트 ‘스프링드라이브’를 실용화해 스위스 시계와의 차별화를 도모했다. 2010년부터는 소매점 개척을 본격화하면서 백화점이나 시계 전문점에 세이코 제품만 취급하는 ‘세이코 프리미엄 워치 살롱’을 선보였다. 그 결과 GS의 매출은 최근 5년 동안 3배나 신장했다. 일본에서 세이코의 기계식 시계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판매망을 꾸준히 늘려가고 있으며 유명 야구선수인 다르빗슈 유를 모델로 기용한 전략도 성공했다. 과거에는 50~60대 고객이 많았지만 최근엔 20~30대로까지 고객층이 확산됐다.
하지만 해외 사업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2010년 GS를 투입했으니 6년 밖에 안 됐다. 특히 개별 소매점을 파고 들지 못한 것이 과제다. 시계 저널리스트나 수집가의 평가는 높지만, 일반 소비자는 아직 세이코에 대해 중급품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경우가 많다.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려면 고객과의 접점을 늘려갈 필요가 있다. 가전 매장처럼 폭넓은 가격대의 상품을 진열하는 소매점이 일반적인 일본과 달리, 해외는 가격대마다 유통망이 분리된 지역이 많아 판로 개척이 쉽지 않다. 이에 세이코는 직판망 정비에 힘을 쏟고 있다. 현재 파리나 프랑크푸르트 등 세계 71개 매장에 ‘세이코 부티크’를 만들었다. 2018년에는 100개로 확대할 예정이다. 핫토리 CEO는 “실제로 제품을 구입해보면 세이코의 매력을 알게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친다. 해외 사업에서 특별히 중점적으로 취급하는 지역은 없다. 시장이 큰 일본과 미국, 중국에서 모두 각자의 전략을 구사할 것이며 어느 한 곳에 집중시키지는 않을 계획이다. 부티크 매장 역시 아시아를 중심으로 출점했으나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매장을 늘리고 있다. 핫토리 CEO는 “브랜드 가치 향상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므로 꾸준히 노력할 필요가 있다”며 “2020년에는 GS가 럭셔리 브랜드 중 하나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경제 주간지 주간동양경제 특약, 번역=김다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