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씨는 “화장실 쪽 벽을 타고 빗물이 들어온다”며 걸레로 마룻바닥을 분주히 닦았다. 그는 “지진으로 집 천장이 2㎝ 정도 내려앉아 혹시 집이 무너질까 봐 추석 연휴 내내 옷을 입고 마루에서 잠을 청했다”며 “계속되는 여진 때문에 추석 때 인사하러 온 자식들도 서둘러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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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경주시 황남동 한옥지구에서 만난 주민 정해윤(67·여)씨는 오른쪽 발목에 파스를 붙이고 파란색 천막으로 뒤덮인 지붕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와 떨어져 나가거나 벽체 균열
지붕에 기와·목재·흙 얹어 하중 커
지진으로 밑이 흔들리며 큰 피해
강진 이후 300여 회가 넘는 여진에다 폭우까지 쏟아져 경주를 비롯한 대구·경북 일대는 추석 연휴 분위기가 사실상 실종된 듯했다. 경주시는 지진 직후인 지난 15일 정부에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건의했다.
지진 발생 6일이 지났지만 한옥이 모여 있는 경주시 황남동 한옥지구와 포석정 인근 배동은 지진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부서진 기왓장이 골목에 떨어져 있고 황남동 주민자치센터 앞엔 기왓장에 깔려 부서진 차량이 그대로 세워져 있다. 일부 한옥 지붕은 파손 흔적이 보였지만 비를 막을 파란 천막조차 씌워져 있지 않다.
황남동의 한 전통시장에서 만난 50대 주민은 “바닥에 떨어진 기왓장, 부서진 차량을 보면서 추석을 즐겁게 보낼 기분이 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여진에다 폭우까지 몰아닥쳐 불안한 마음에 추석날 아침밥을 경주시내 친척집에 가서 먹었다”고 말했다. 일부 주민은 140㎜ 이상 폭우가 내린 지난 16일 오전부터 17일 오후까지 집안 곳곳에 물이 새어 양동이를 가져다가 물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황남동 한옥에 사는 강문주(46·여)씨는 매년 추석 때 과일만 6~7가지, 전을 7가지 이상 부쳐 차례를 지낸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는 기존 차례 음식의 딱 절반만 차렸다고 했다. 그것도 일부 음식은 부랴부랴 친척집에 가서 얻어다 차례상에 올렸다.
지난 12일 지진으로 기왓장이 부서지는 피해를 봤고 여진에다 비까지 내리면서 추석 차례상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강씨는 “추석 연휴에 시장 대신 동네 철물점에서 비닐을 사 와서 누수 피해를 막는 데 애를 썼다. 지진 때문에 차례상 차리기에 소홀해 조상님께 죄송하다”고 말했다.
경주 도심 주민들도 추석을 거꾸로 보내긴 마찬가지였다. 40대 주부는 “자식들을 경주로 부르지 않고 대구·부산으로 추석을 쇠러 떠나는 어르신이 적지 않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경북도의 집계에 따르면 18일까지 경주에서만 이번 지진으로 기왓장이 떨어져 나갔다고 신고한 한옥이 2031채였다. 특히 황남동의 경우 한옥 3300여 동 중 670여 동에서 기와가 떨어져 나가거나 벽체 균열 등의 피해를 봤다. 이번 지진 와중에 경주에서 유달리 한옥 피해가 많았던 이유는 그동안 경주시가 신라 천년 고도(古都)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정책적으로 한옥 건축을 적극 장려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주에서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은 1만2000채가 넘는다.
경주시의 한옥 장려정책이 뜻하지 않게 지진 피해의 급소(아킬레스건)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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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피해 현장을 둘러본 단국대 박종근(건설방재안전공학과) 교수는 “구조적으로 한옥은 지붕에 기와·목재·흙 등을 얹어 하중이 많이 나간다. 그런 상태에서 아랫부분에 조금이라도 흔들림이 발생하면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지진 피해를 본 한옥 기와지붕 교체비용의 70%를 지원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다.
대구·경주=송의호·김윤호 기자 yee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