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작가전] 나는 살해당했다 #3

중앙일보

입력 2016.08.2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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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라도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 날 찾아와. 주소는 아까 알려줬지? 그리고 말이야. 이건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내가 가르쳐준 것들, 꼭 명심해. 귀신으로 이승에 머물려면 꼭 알아둬야 하는 필수사항이니까. 내 말 허투루 들었다간 낭패를 겪을 수 있어.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속도 좋아. 돈벌이를 망친 당신한테 이렇게 친절한 설명까지 해주니 말이야. 안 그래? 어쨌든 건투를 빌겠어.”

도화는 나를 시내에서 내려주고는 중요한 약속이 있다며 종로로 향했다. 내려주었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지금 명동 거리 한복판을 돌아다니고 있다. 주말이라 많은 인파로 북적거렸지만 이동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문득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사람들이 나를 통과할 때마다 몸을 약간 움찔하거나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주 둔한 사람은 그냥 뒷머리를 긁적이는 정도로 그쳤다. 내 존재가 이렇게나 사람들에게 감지된다는 사실이 은근히 기뻤다. 그러다 호기심이 생겨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역시나 지나친 기대였다. 신체와 접촉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반응이 없었다. 하기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도화 같다면 그녀는 당장 밥벌이를 잃고 말겠지. 나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포기하고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소를 이동하려면 ‘의지’가 중요하다고 도화가 일러주었다. 나는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집으로 가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면서 지하철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고,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며,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까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이동했다. 뭐,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기분이 묘했다. 마치 무임승차를 하는 느낌이랄까.

나는 흰색 투피스 정장을 예쁘게 차려입은 젊은 아가씨 뒤에 서서 열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 죽은 뒤에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시각과 청각을 제외하면)이 있다면 그건 후각이라고, 도화가 말해주었다. 냄새를 맡는 것은 듣고 보는 것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떤 냄새는 나처럼 죽어버린 존재에게 힘을 북돋워 주기도 하고, 또 어떤 냄새는 힘을 약화시키고 마침내는 소멸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잘 모르겠지만, 전자의 경우는 아마도 지금 내가 맡고 있는 향수가 아닐까 싶다. 점차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좀 더 가까이 맡고 싶어서 그녀에게 바짝 붙어 섰다. 내가 살아있었더라면 당장 치한으로 몰려 망신을 당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향수 냄새가 한결 짙게 느껴졌다.


그녀가 나를 감지했는지 목을 움츠리며 손으로 뒷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린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어깨를 문지르며 가볍게 떨었다. 내게서 한기를 느낀 모양이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데,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리니 터널 저편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당고개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저 열차를 타면 집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이제 아내를 볼 수 있다.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반대편 터널로 고개를 돌렸다. 맨 끝자락에도 정장을 입은 넥타이족들이 대여섯 명 정도 서 있었다. 모두 격무에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나이는 마흔 정도 되었을까, 초췌한 몰골이 보기에 안쓰러워 보였다. 다림질을 하지 않았는지 엉망으로 구겨진 회색 양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상한 점은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양말도 신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하는데 순간 남자가 철로로 몸을 날렸다. 나는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나만 비명을 지른다.

아니, 왜? 곧이어 열차가 도착했다. 급정지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열차에 탑승했다. 내 앞에 서 있던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이 역 안에서 참사를 보고도 동요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멍청히 서 있는 사이에 열차가 출발해버렸다. 플랫폼에 죽음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남자가 몸을 날렸던 곳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솔직히 그 끔찍한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나 궁금했다. 죽어서도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인 모양이다. 물론 남자의 안위도 걱정되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철로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라.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남자가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는데, 철로 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했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리는데 ‘그 남자’가 바로 내 옆에 서 있었다.

 아악!!

나는 깜짝 놀라 바보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남자는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지 초점 없는 눈으로 철로를 바라보더니 또다시 몸을 날렸다. 나는 그를 말리려고 무심결에 손을 뻗었지만 이미 철로 위로 떨어진 후였다. 곧 흐느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연기처럼 사라졌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형체가 흐려지면서 공간으로 녹아들었다. 그러더니 어느 결에 내 뒤에 다시금 나타났다. 역시 처음과 똑같은 표정으로 철로를 바라본다. 이어지는 행동도 똑같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철로로 몸을 날렸다. 그 같은 행동을 내 앞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마치 비디오테이프를 계속 되감아 보는 것 같았다. 승객들이 플랫폼으로 하나둘씩 나타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다. 그는 나와 같이 ‘죽은 사람’이었다. 도화의 표현을 빌리면 넋만 남은 존재라고 해야 할까. 이 남자는 지박령이다.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한 채, 죽기 직전의 행동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왠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이 남자와 같은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서글퍼졌다. 내가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가 없다. 그는 나를 인식하지도 못한다. 우린 서로 같은 처지임에도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만 그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거기까지다. ‘죽는다는 것’은 이토록 철저히 고립되는 것이다. 마음이 아팠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바람이, 열차를 이끌며 플랫폼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이 열차에 타기 위해 안전선 앞으로 몰려왔다. 나는 그 무리에 합류하여 열차에 올라탔다. 곧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했다. 플랫폼에 ‘그 남자’를 남겨두고. 열차가 터널에 진입하기 직전,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만 끝내고 싶다. 남자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몸을 날렸다. 철로가 있는 내 쪽으로.

나는 엉겁결에 두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내 팔을 벗어나 바닥으로 추락했다. 밑으로, 또 밑으로. 그러고는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멍하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손안에 그의 체온이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따듯하고 애잔한 기운이……. 나는 가만히 손을 쥐었다.

불 켜진 거실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아내가 거실에 있는 것 같다. 침실이나 서재는 불이 꺼져 있었다. 방마다 창문이 굳게 닫혀있고 커튼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베란다도 마찬가지다. 불빛만 두꺼운 커튼을 통과해 엷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아내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물론 내 목소리가 들릴 리 없다. 당연히 대답도 없고, 아무런 반응도 없다.

나는 망설였다. 아내를 보겠다고 여기까지 와놓고,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밖에 멍하니 서 있다. 막상 집 앞까지 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볼 수만 있을 뿐, 말을 걸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는 것이 주저하게 만든 지도 모르겠다.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면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이 아파트 단지는 여전히 조용하다. 이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들의 성향이 전반적으로 비슷한 것인지 일단 귀가하면 어지간해선 밖으로 잘 돌아다니지도 않는다. 덕분에 늘 한산한 분위기다. 내가 살아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변한 것이 있다면 내가 죽었다는 사실 정도…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파트 현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내려왔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서 사람이 내렸다. 나는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막내 처제였다.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내 처지도 잊은 채 처제를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처제는 허깨비처럼 나를 통과한다. 아니, 허깨비는 내 쪽인가. 나는 무심결에 처제를 뒤따라갔다. 처제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내에게서 내 소식을 들은 것일까. 그렇다면 아내는 이미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걱정만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처제에게 물을 수 없었다.

  처제! 처제! 나야, 형부라고! 처제!

부질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녀에게 나를 어필해보았다. 역시나 결과는 마찬가지. 처제는 굳은 얼굴로 묵묵히 도로변까지 걸어 나왔다. 택시를 잡으려는 모양이었다. 하기는, 여기서 이문동 처갓집까지 가려면 택시가 가장 편하다. 처제는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핸드폰은 최신형 기종인데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TV 광고에 많이 노출된 상품이라는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대롱대롱 흔들리는 토토로 미니어처, 핸드폰에 매단 액세서리도 낯설지 않았다. 혹시 내가 선물했던 것인가? 모르겠다. 기억이 흐려서 분명치 않다. 

“형부, 어디 있는 거예요. 전화라도 해줘요…….”

처제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처제. 하지만 연락을 하고 싶어도 나는 지금 그럴 수가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내 마음이 전해지도록. 그러나 전혀 닿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도화의 말이 떠올라 무력감을 느꼈다. 택시가 처제 앞에 멈춰 섰다. 처제는 나를 남겨둔 채 택시를 타고 떠나버렸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멀어져 가는 택시를 바라보다가 택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아파트 단지로 돌아왔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거실을 밝히던 불이 꺼져 있었다.

아내는 벌써 잠든 것일까. 아직 자정도 되지 않았는데, 좀 더 날 기다려주진 않고 잠을 청하다니. 갑자기 서운한 마음이 든다. 이제 어쩌지. 마냥 이렇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는 모습이라도 보고 올까? 아니다. 지금은 아내를 본다고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럼 이제부터 무엇을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에 빠져 있는데 가로수 뒤쪽으로 뭔가 검은 작은 물체가 느릿하게 지나가는 게 보였다. 몸집이 작고 날씬한 길고양이였다. 털색이 까맣고 꼬리와 발끝만 하얀 녀석이었는데 걸음걸이가 당당했다. 녀석은 신통하게도 나를 알아봤는지 샛노란 눈동자를 번뜩이며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주의 깊게 나를 응시하면서 아주 느리게 거리를 좁혀왔다. 대부분의 고양이들이 그렇듯 이 고양이도 꽤 신중했다. 원래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이 녀석은 그렇게 심한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제 간격은 두어 걸음 정도. 가까이서 보니 생각 이상으로 늠름하게 생겼다. 사람이 기르던 녀석인지 목에는 빨간색 가죽 끈을 매고 있었다. 주인이 괴롭혀서 못 견디고 도망쳐 나온 것일까? 막연하게 추측을 하면서 조심스레 손을 뻗어보았다.

캬악. 갑자기 녀석이 이빨을 드러내고 꼬리를 바짝 곧추세우며 적의를 드러냈다. 나를 할퀴기라도 하겠듯이 앞발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순간 나는 당황해서 손을 황급히 뺐다. 이 녀석,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문득 억울한 심정이 들어서 녀석을 노려보았다. 할퀼 수 있으면 어디 할퀴어봐라. 어차피 나는 육체가 없으니까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거야. 이 버릇없는 고양이 녀석아!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했다. 고양이에게 적의를 느끼는 순간, 내 안 어딘가에서 폭풍이 일면서 분노가 한순간에 극한으로 치달았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내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오랜만에 만난 처제에게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것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인데, 이런 하찮은 길고양이에게 무시당하고 내몰렸다는 생각까지 들자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건방진 녀석을 짓밟고 싶었다. 녀석을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고 싶고, 죽이고 싶었다.

죽여 버리겠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분노를 한순간에 표출하는 순간 어떤 기운이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온 것 같다. 그 기운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 같은 형태로 뻗어 나와 길고양이를 멀찌감치 날려버렸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가로수들이나 아파트 유리창들도 심하게 흔들렸다. 거의 수 미터를 날아간 길고양이는 얄밉게도 허공에서 몸을 틀어 가볍게 착지하더니 보란 듯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분한 마음이 일어나는 동시에 놀라움도 느꼈다. 방금 전의 일,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내게 주어진 힘? 야옹. 녀석이 작게 운다. 마치 가소롭다는 눈초리로 나를 보는 것 같다. 다시 분노가 치솟았다. 녀석도 격렬하게 털과 꼬리를 세우며 반응한다. 이 녀석, 길고양이 주제에 나와 맞서겠다는 것이냐! 나는 조금 전의 감각을 되살려보았다. 오오, 확실히 뭔가 반응이 느껴졌다. 이것으로 어렴풋이나마 요령을 알 것 같았다. 요컨대 핵심은 감정의 조절이었다. 나는 녀석을 상대로 실험해보았다.

예상이 적중했다. 바람과 같은 기운이 다시 일면서 녀석을 날려버렸다. 그것은 내 ‘분노’였다. 감정이 격해지고 극에 달하면 이렇게 물리적으로 전이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어떤 원리에 의한 것인지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저 건방진 녀석을 혼내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녀석은 이번에도 고양이 특유의 유연성으로 안전하게 착지했다. 이번에는 좀 분했는지 내려서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래봤자 네 녀석은 날 건드리지도 못해. 나는 무모하게 달려드는 녀석을 보며 가학적인 쾌감을 느꼈다. 녀석을 다시 한 번 날리려는 찰나,

“허어, 뒈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사념(思念)을 다루는 요령까지 터득한 잡귀(雜鬼)라니! 고약한 놈이로구나. 아주 고약해. 풍기는 냄새도 아주 역겨워!”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남루한 차림의 노인 하나가 오른손으로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그냥 봐도 지하철역이나 길바닥에서 구걸이나 하는 거지처럼 보였는데, 몸에 걸친 옷도 언제 세탁을 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때가 덕지덕지 낀 더러운 군복이었고, 구멍이 숭숭 뚫린 낡은 군화를 신고 있었다. 머리에 눌러 쓴 모자도 군용이었고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상사 계급장까지 달려있었다. 거기에 또 어울리지 않게 짙은 레이 밴 선글라스를 썼다. 어쩌면 맹인일지도 몰랐다.

“이 육시랄 놈아, 뒈졌으면 곱게 떠날 것이지 뭔 미련이 남아서 이승을 떠돌아!”

나는 당황했다. 저 노인네가 미친 게 아니라면 분명 내게 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 노인네는 내가 보인다는 말인가. 도화처럼? 분명 내용을 들어보면 나를 두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믿기 어려웠다. 이럴 수도 있는가. 도화 같은 사람을 하루에 두 번이나 만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는가. 또, 한편으로 불안하기까지 했다. 뭐랄까, 도화를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노인은 도화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어딘가 모르게 ‘위험’이 느껴졌다. 곧 그 위험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노인의 뒤쪽으로 소리 없이 나타난 크고 검은 그림자들. 나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림자들은, 전부 몸집이 송아지만 한 개들이었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도사견이나 그 비슷한 견종 같았다. 헤아려보니 모두 일곱 마리나 되었다. 하나같이 무섭게 생긴 개들이었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두니, 나를 약 올리던 길고양이가 보였다. 녀석은 어느 틈에 노인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소리를 내며 등을 부비며 아양을 떨고 있었다. 놀랍게도 녀석은 이 노인의 일행이었던 것이다. 어떤 함정에 빠져든 기분이었다.

설마 노인장은 내가 보이오?

내 의사가 전해진 것일까. 노인이 키득키득 웃더니 선글라스를 손으로 살짝 올린다. 덕분에 노인의 두 눈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하얗게 백태가 낀 눈을. 노인은 예상대로 맹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어떻게 알아보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드는데 노인이 선글라스를 다시 내리며 대나무 지팡이로 바닥을 탁탁 쳤다. 그러자 개들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도대체 경비들은 뭐 하느라 이런 미치광이 노인과 맹견들이 돌아다니도록 놔두는 것일까.

“네놈도 봤겠지만 난 장님이야. 내 눈은 오래전에 시력을 잃었지. 대신에 나는 심안(心眼)을 얻었어. 그래서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가 있어. 이를테면 너 같은 망자들을 말이야. 또 눈이 안 보이니 코가 아주 예민해. 그래서 냄새도 잘 맡아. 특히 잡귀들의 냄새를. 네놈에게도 아주 역겨운 냄새가 나거든? 아주 멀리에서도 맡을 수가 있었어. 난 그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온 셈이지. 악취가 사방에 진동한단 말이야.”

  노인이 킥킥거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래서 그 냄새를 지울 참이야. 어떻게? 당연히 널 잡아야겠지. 왜? 못할 것 같아? 넌 이미 죽었으니까?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좋아. 그럼 문제를 하나 내지. 여기 내 곁에 있는 이 귀여운 아이들이 보이지. 이 아이들이 너를 잡을 수 있을까, 없을까?”

나는 이런 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응하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노인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자기 생각을 관철시킬 모양이다.

“탐랑(貪狼)! 거문(去文)!”

노인이 이름을 부르자, 털빛이 시커먼 개와 불그스름한 개가 앞으로 나섰다. 두 마리 모두 내게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벌린 주둥이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송곳니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저 무시무시한 송곳니는 왠지 지금의 ‘나’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분노는 소리 없이 가라앉고 대신에 공포가 고개를 내밀었다.

“사냥하기 좋은 밤이구먼.”

노인이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작가 소개
창작그룹 <화담>대표.    
소설가,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등
 
주요 출간작 >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카르마,
우리가 연애를 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웅진 시작), 한국 환상문학단편선(웅진) 기획 및 작품 수록
영화소설 '열한 시', '또 하나의 약속', '수상한 그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