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출범시킬 때도 그는 기독교의 전파보다도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에 큰 역점을 두었다. 권위주의 체제가 추진하는 산업화 과정을 시비하는 데 머물지 않고 경제 발전과 산업사회의 출현이 수반하는 비인간화와 양극화의 폐해에 대해 우리 사회의 관심과 지혜를 모으고자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그가 빈 들에서 외치던 인간화와 양극화의 과제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국가적 난제로 남아 있지 않은가.
목사님은 그러한 난제를 예견한 선각자였지만 탁상공론에 그치는 공허한 대화주의를 경계하는, 실천과 행동의 종교지도자였다. 그는 평화와 타협을 위해 극과 극 사이, 즉 중도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한승헌 변호사의 표현에 따르면 “중간(中間)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살고자 했던”, 박종화 목사의 지적대로 “제3의 길, 대안을 찾아내는 창조적 통합주의자”였다고 기억된다. 그러기에 그가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여운형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권위주의 체제의 숨 막히는 답답함 속에서 민주화·인간화로 향한 광범위한 국민적 바람과 대다수 지식인의 이성적 판단이 인간 중심의 대화에 대한 동력을 결집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권위주의 시대가 일단 막을 내리면서 국가공동체 운영을 맡아야 할 정치인과 시민공동체의 논의를 이끌어갈 학술·문화·언론 분야의 지식인들이 함께 대화를 나눌 초점을 잃고 동력이 분산돼 버렸다는 가설도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87년의 민주화는 강 목사님이나 크리스챤아카데미의 대화 활동에 힘을 보태주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87년 민주화는 대통령직선제와 단임제를 핵심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진행되면서, 국가 운영을 맡은 대통령과 국민의 대화, 그리고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와 연결고리가 되는 정당의 민주적 운영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틀은 정확히 마련되지 않은 채 민주화 시대로 출발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민주화 이후 정치 엘리트와 사회·문화·학문 엘리트 사이의 진지한 대화의 관행은 점차 수그러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21세기로 들어서며 한국에선 민주공동체 운영을 위한 헌법적 틀과 관행이 극도로 미비한 가운데 개혁의 제도화를 위한 대화의 장은 축소되면서 민주화와 인간화의 방향축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양극화와 파편화의 증상이 심화되는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2006년 8월 21일 강 목사님 영전에서 김수환 추기경께서 올린 기도는 우리 국민의 착잡한 마음을 읽으신 간곡한 호소였다. “목사님, 하나님께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십시오. 오늘날 우리나라는 남북 분단에다 지역, 계층, 좌우익 분열과 적대감 속에 더욱 갈라져 있습니다. 매일같이 서로 주고받는 말은 격하고 나라 장래가 어떻게 될지 가늠하기 힘듭니다. 제발 대한민국이 뿌리째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목사님, 우리 모두 차분하게 앉아서 목사님이 그렇게도 강조하시고 실천하신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구하여 주십시오.” 10년 전에 가신 강원룡 목사님, 이어 2년 반 후에 떠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간절한 기도에 우리의 정성을 더해 양극화를 극복하고 민주화와 인간화를 이루기 위한 국민적 대화의 힘을 되찾아야겠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