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을 적신 책 한 권] 방황하던 20대 청춘 물리학도…삶의 지평 넓혀준 헤세의 감성

중앙일보

입력 2016.08.06 00:32

수정 2016.08.12 10:26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민음사
494쪽, 1만1000원

물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대학원 시절 많은 책을 읽었다. 주로 본 책은 과학책이 아닌 소설·수필·시·인문서였다. 그래도 기억나는 과학책은 양자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슈뢰딩거 방정식을 만든 에르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런 과학책을 이해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내 성향과 뇌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했지만 나는 비이성적이고 촉촉한 감성적인 것들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런 내 앞에 놓인 책이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이었다.

20대 후반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혼돈과 방황 아니었을까. 공부에 몰두해야 할 와중에 혹독한 실연을 겪었고 학문적으로라도 앞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실험실에 처박혀 있던 시절이었다. 『지와 사랑』은 고정된 내 뇌를 흔들어 놨다. 감정을 폭발시켰고 감동과 위안을 주었다. 고정된 세계로부터 뛰쳐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또 장대한 이야기 속 골드문트의 가슴 아픈 그리움, 심장의 불안한 고동, 꿈속의 기쁨과 불안들로 뒤섞인 삶 속에서 용기를 얻어 불안한 내 삶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 내 20대는 지나갔고 30대에는 외국 여러 나라에서 방랑하듯 공부를 했다. 30대에는 단 한 권의 책을 읽어본 기억이 없다. 물리학이라는 거친 학문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골드문트처럼 밤낮을 잊은 채 연구로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면 거짓말일까. 그렇게 10년을 보냈다. 40대에 물리학을 배우는 사람에서 가르치는 사람으로 입장이 바뀌어 서울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많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은 모든 책이 20대 시절처럼 내 가슴을 적셔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책은 지식을 주었고 감성을 자극하는 존재로 자리잡고 내 곁을 지켰다.그렇게 십 몇 년이 흘렀다.

올해 초 포르투갈을 다녀온 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응급실에 실려갔다. 여행 중 병을 얻은 것이다.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 후 3주를 병실에서 지냈다. 병실에서 『지와 사랑』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왜 그랬을까. 하지만 그 책을 읽지 못하고 퇴원을 했고 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방학이 되어 파리에 있는 연구소에 머물던 중에 ‘내 가슴을 적신 책 한 권’ 원고 청탁을 받았다. 책 『지와 사랑』이 바로 떠올랐다. 파리에 있는 문화원 도서관에 갔다. 내가 기억하던 『지와 사랑』 제목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로 바뀌어 그곳에 있었다. 수도원이 나오는 첫 장면에서 나르치스 옆에서 골드문트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단어 하나, 쉼표 하나, 문장 한 줄, 마침표까지 감동과 전율을 느끼며 천천히 읽어갔다. 읽으면서 내가 20대 때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을까를 반복해서 생각했다. 내가 감동한 페이지에는 이상하게 책장 모서리 끝을 누군가가 삼각형으로 접어놓았다. 책의 앞부분에 접어놓은 것이 많았다. 나는 뒷부분에 접고 싶은 페이지가 많았지만 접지 않았다. 언제 다시 나는 이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까.
 
이기진은

연구 중 틈틈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물리학자. 서강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프랑스·아르메니아·일본 등에서 유학을 했다. 전공은 마이크로파 물리학이다. 동화 『박치기 깍까』와 청소년을 위한 책 『20UP』을 포함해 17권의 책을 썼다. 그룹 2NE1의 멤버 씨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