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학생운동이 부활한 1960년대 미국 뉴욕이나 영국 런던 거리에 울려 퍼지던 구호가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뉴욕 맨해튼을 휩쓴 월가 점령운동 단체가 뿌린 전단의 일부도 아니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 보호무역…
정강에 자기 색깔 반영한 샌더스
지지자들 향해 “우리가 이겼다”
금융거래 제한 위해 거래세 강화
CNBC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정강”
클린턴 정책도 급좌회전 가능성
이번은 아니었다. 정강 내용뿐 아니라 협상 과정부터 미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워싱턴포스트(WP)나 뉴욕타임스(NYT) 등이 보도한 ‘민주당 정강위원회 세력 다툼’ 등이다. 계기는 한 인물의 존재였다. 버니 샌더스다. 힐러리 클린턴과 대선후보 경선을 펼친 상원의원이다. 그는 스스로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한다.
이번 정강의 핵심 내용은 최저임금 대폭 인상,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이다. 그런데 미국 내에선 정작 주목받는 대목이 따로 있다. 바로 정강 13장 가운데 세 번째에 배치된 ‘경제정의’ 항목이다.
이는 ‘관치금융의 아버지’인 햘마르 샤흐트 전 독일 중앙은행 총재가 1932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했던 말과 유사하다. 그는 당시 “세계 금융계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생산적인 영역이 아니라 주식 투자 등에 돈을 너무 많이 공급해 거품과 공황이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이후 샤흐트는 시중 자금이 증시나 비생산적인 영역으로 흘러가는 것을 공격적으로 억제했다. 대신 아우토반(고속도로) 건설 등에 특별금융을 적극 지원했다. 관치금융의 시작이다.
한술 더 떠 민주당은 사실상 금융거래도 제한할 요량이다. 엄청난 속도로 자산을 사고파는 컴퓨터 프로그램 트레이딩 등을 제한하기 위해 거래세를 강화하기로 했다. 거대 금융그룹을 쪼개 투자와 시중은행으로 나눌 계획을 분명히 했다. 이 밖에 ▶독점 규제 강화 ▶법인세 감면 제한 ▶부자 증세 등을 명시됐다.
보수적인 금융 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월스트리트 제국』이란 책에서 “민주당은 18세기 독립 이후 줄곧 금권(money power)을 경계하고 반대해왔다”고 설명했다. 실제 민주당의 이념적 아버지인 토머스 제퍼슨(미국 초대 국무장관, 3대 대통령)은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이 추진한 중앙은행 설립을 극력 반대했다. 금융권력이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집중될 가능성 때문이다. 대신 제퍼슨은 “주별로 독립적인 세금 제도와 금융 시스템이 우리에게 적합하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1791년 해밀턴은 제퍼슨 세력의 반대를 뚫고 중앙은행 격인 합중국은행(Bank of United States)을 설립했다. 합중국은행은 20년 후인 1811년 폐쇄됐다. 이어 1816년 2차 합중국은행이 설립됐다가 1836년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 합중국은행을 폐지했다. 면허를 연장해주지 않는 방식이었다. 금융 역사가 고든은 2009년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합중국은행 폐지 이후 미 통화와 금융 시스템은 빠르게 성장하는 미국 실물경제와 부조화 상태였다”고 말했다.
결국 민주당은 현실과 타협했다. 19세기 후반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1910년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경제적 필요 때문에 월가가 원하는 정책을 받아들였다. 윌슨은 연방준비제도(Fed)를 설립해 안정적인 통화 공급과 경기 조절을 가능하게 했다.
타협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윌슨 직전 대선 후보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반(反)월가 정책을 내걸었다. 긴장한 월가가 윌리엄 매킨리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브라이언의 집권을 막았다.
역사적인 흐름에 비춰 보면 2016년 민주당 정강은 제퍼슨-잭슨-제닝스-루스벨트 시대에 표면화한 반(反)금권 DNA가 다시 힘을 발휘한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반월가 정책이 정강이란 공식 문서에 명시됐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조짐이 있다. 힐러리의 러닝메이트(부통령) 결정이다. 샌더스 못지않게 진보적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거론되고 있다. 정치전문 매체인 슬레이트는 “윌슨이 반월가 대선 후보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1918년 국무장관에 지명한 것과 비슷한 일이 2016년에 재연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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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은 대선 도중 민주당 좌파의 지지를 끌어들이기 위해 브라이언을 국무장관에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브라이언은 윌슨이 월가 쪽으로 기우는 것을 끊임없이 견제했다. 반월가 대표주자인 워런 상원의원이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면 힐러리 집권 이후 어떤 역할을 할지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16년 민주당 정강은 죽은 문서가 아니다. 살아서 활활 타오르는 문서다.
미국 민주당 정강정책 위원회=미국 민주당 정강은 1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정한다. 2016년 정강은 올 5월 구성된 위원회에서 제정됐다. 올해 위원회는 힐러리 클린턴이 추천하는 위원 6명,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추천하는 위원 5명,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위원장인 데비 바서만 하원의원이 추천하는 4명으로 채워졌다. 소수파인 샌더스 진영에 5명이나 배정됐다. 힐러리가 샌더스의 지지를 끌어들이기 위한 양보였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