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가 작으니 파도가 치면 이리저리 기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풍랑이 몰아칠 때는 어땠을까. 어부들은 목숨을 걸기도 했을 터이다. 갈릴리 호수의 둘레는 63㎞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호수의 이쪽과 저쪽을 오갈 때 종종 배를 탔다. 걸어서 가려면 호수를 빙 돌아가야 했다. 배를 타는 게 훨씬 빨랐다.
그날도 예수는 제자들과 배를 탔다. 그런데 호수에 큰 풍랑이 일었다. 넘실대는 파도가 배 위를 덮쳤다. 거센 파도 속에서 배는 위태롭게 기우뚱거렸다. 마가복음에는 ‘물이 배에 거의 차게 되었다’(4장37절)고 적혀 있다. 그 와중에도 예수는 자고 있었다. 그날도 하루 종일 메시지를 전하고, 마음이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고, 몸이 아픈 이들을 돌보았을 터이다. 그런 일과를 마치고 배에 올라탄 예수는 곯아 떨어졌다.
상황은 심각했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한 말은 이랬다.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복음 8장25절) 제자들이 ‘죽음’을 거론할 정도였다.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예수는 눈을 떴다. 예수는 오히려 호들갑떠는 제자들을 나무랐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자리에서 일어선 예수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꾸짖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성경에는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마태복음 8장26절)고 기록돼 있다. 배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복음 8장27절)
호숫가에는 피크닉 공간이 있었다. 풀밭에 파라솔도 설치돼 있었다. 거기에 앉았다. 바로 앞에 갈릴리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궁금했다. 배가 뒤집어 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깨웠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가복음 5장38절) 그렇게 물었다. 배가 침몰할 지경이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묻지 않았을까. 그런데 예수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가복음 4장40절)고 나무랐다. 왜 그랬을까.
호숫가를 거닐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다. 우리는 파도다. 이리 철썩, 저리 철썩.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씩 출렁이는 파도다. 아침 출근길에 옆차가 끼어들 때도 출렁이고, 차가 막혀서 결국 지각할 때도 출렁인다. 직장 상사에게 불려가 한 소리 들을 때도 출렁이고, 집에 돌아가 배우자와 말다툼을 할 때도 출렁인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게 파도의 일생이라고. 어쩔 수 없다고. 세상에 출렁이지 않는 파도가 어디에 있느냐고 말한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복음 1장5절)
무슨 뜻일까. 빛은 늘 어둠 속에 있다. 다만 어둠이 빛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어둡다. 빛이 없어서 어두운 게 아니다. 빛이 있는데도 보지 못해 어두울 뿐이다. 그걸 뒤집으면 어찌 될까. 우리의 어둠 속에는 ‘희망’이 숨어 있다. 우리의 절망 속에는 ‘희망’이 숨어 있다. 빛이 이미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아 날마다 허덕대는 그 짙은 절망 속에 이미 빛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이 구절은 ‘파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파도는 두렵다. 겁이 난다. 불안하다. 왜 그럴까. 자기 안의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도 속에도 이미 빛이 있다. 그러나 파도는 그 빛을 보지 못한다. 파도 속에서 빛나는 빛. 그게 대체 뭘까. 다름 아닌 ‘바다’다. 요한복음 1장5절에 대입하면 이렇게 된다.
‘그 바다가 파도 속에서 출렁이고 있지만
파도는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는 달랐다. 겁을 내지도 않았다.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제자들을 나무랐다. 왜 그랬을까. 예수의 눈에는 ‘파도 속의 바다’가 보이기 때문이다. ‘어둠 속의 빛’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높고 거센 파도가 몰아쳐도 예수는 개의치 않는다. 파도는 그저 바다일 뿐이다. 부서질 일도 없고, 소멸 될 일도 없다. 그래서 예수는 쿨쿨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어둠 속의 빛을 보고, 파도 속의 바다를 보는 일. 붓다는 그걸 어떻게 표현했을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붓다는 그렇게 표현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고요해진다. 바람이 불 때도, 파도가 때릴 때도, 천둥이 내려칠 때도 고요 속에서 걸어간다.
마가복음의 영어 성경을 보면 ‘고요의 정체’가 더욱 명확해진다. 예수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고 하자 마가복음은 ‘아주 고요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어로는 ‘there came a great calm’이다. 단순한 고요가 아니다. ‘거대한 고요(a great calm)’다. 그리스어 성경에는 ‘galene(calm) megas(great)’로 돼 있다. 세상의 고요가 다 ‘거대한 고요’는 아니다.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볼 때 비로소 ‘거대한 고요’가 밀려온다. 어둠이 자기 안의 빛을 볼 때 비로소 ‘거대한 고요’가 드러난다. 그때 우리의 삶도 잠잠해진다.
파도는 어디에서 생겨날까. 그렇다. 바다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둘의 속성이 하나다. 그런데 바다에서 ‘툭’ 떨어져 공중으로 솟구친 파도는 바다를 잊어버린다. 자신이 어디에서 생겨났고,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망각하게 된다. 그게 예수의 제자들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김OO’‘이XX’‘박△△’란 이름의 한 조각 파도가 되자마자 바다를 잊고 만다. 그들의 세상에는 바다는 없고 파도만 있을 뿐이다.
심청도 그랬다. 심청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었다. 무슨 뜻일까. 파도는 바다에서 ‘툭’ 튀어나오자마자 바다를 여읜다. 자신이 태어난 근원을 상실한다. 어머니를 잃은 심청이 그걸 상징한다. 그래서 파도는 두렵다. 불안하고 겁이 난다. 폭풍이 몰아칠 때는 더하다. 사라질까봐, 죽게 될까봐 파도는 덜덜 떤다. 예수의 눈에는 보인다. 그 이유가 빤히 보인다.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보려면 어찌해야 할까. ‘나는 파도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심청은 중국 난징(南京)을 오가는 뱃사람에게 목숨을 판다. 그게 십자가다. 어둠이 빛을 찾고, 파도가 바다를 찾기 위해 짊어지는 심청의 ‘자기 십자가’다. 쉽지는 않다. 바다를 모르는 한 조각 파도에게 그건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심청은 배를 탔다. 배는 서해로 떠났다. 아니나다를까. 풍랑이 몰아친다. 집채만한 파도가 몰려온다. 뱃전을 ‘탕! 탕!’ 친다. 큰 배가 휘청휘청한다. 폭풍은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심청의 마음이 요동친다. 덩달아 파도도 출렁인다. 심청과 파도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뱃사람이 외친다. “여보시오, 심낭자! 얼른 물에 드시~오!”
‘풍덩!’하고 심청이 물에 빠진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하늘을 삼킬 듯이 몰아치던 폭풍, 바다를 삼킬 듯이 달려들던 파도가 ‘촤~악!’ 가라앉는다. 순식간에 잠이 든다. 방금까지도 ‘으르렁! 쾅쾅!’하며 달려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고요(a great calm)’가 드러난다. 왜 그럴까. 파도가 바다를 만났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깨닫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심청이 용궁을 거쳐 다시 세상으로 나올 때는 연꽃을 타고 나타난다. 왜 연꽃일까. 물에 젖지 않기 때문이다. 연꽃은 폭풍 속에 있으면서도 흔들림이 없고, 파도 속에 있으면서도 물듦이 없다. 그게 ‘거대한 고요’다.
“네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파도인가, 아니면 바다인가.”
철썩거리는 갈릴리 호수의 파도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요한복음이 떠올랐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복음 1장5절)
“그 바다가 파도 속에서 출렁이고 있지만
파도는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23회에서 계속됩니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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