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조선의 샐러리맨을 궁핍에 몰아넣은 '전월세 대란'

중앙일보

입력 2016.06.11 11:22

수정 2016.06.1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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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 경성 주거난/ 조선의 샐러리맨들을 궁핍에 몰아넣은 '전월세대란'


#1
각종 공장과 은행, 관청 등이 밀집했던
조선 제일의 도시, 경성(서울)
사진설명/ 영화 '암살'에서 그린 경성의 모습

#2
일제의 수탈로 퍽퍽했던
서민들의 삶을 더욱 꼬이게 만든 것은...
바로 ‘전월세 대란’
“전 경성의 주민이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29년 11월 16일, 한 신문
사진설명/ 1930년대 서울 시가지

#3
1930년대 경성의 거주자는 70만명 이상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살 곳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35년 19.4%, 1938년 23%, 1940년 25%, 1944년 40%로 악화된 주거 부족율
사진설명/ 1930년대 종로 거리

#4
1938년 경성부 인구의 60%인 42만명이 자가(自家) 없이
집세를 내거나, 방 한 두칸을 빌려 사는 차가(借家) 거주자
사진설명/ 일제강점기 당시 운종가

#5
서민들을 더욱 힘들게 했던 건 그나마 안정적이던 '전세'를 구하기 힘들었던 것
대한제국기만 해도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 대신 3개월~1년간 해당 가옥에 사는 전세가 일반적이었지만

#6
1930년대 이후 물가가 상승하자
집주인들은 언제라도 임대차 계약을 파기하고
높은 집세를 부를 수 있는 월세를 선호하면서
임차료 폭등도 이어졌다.
사진섦여/ 남대문시장과 명동일대 [한국민속홍보센터]

#7
“물가가 앙등한다는 것을 핑계삼아 집세를 올려
하급 싸랄리맨(샐러리맨)을 궁핍한 구렁으로 노라너헛다.” - 1937년 5월 20일, 매일신보
조선인 급여 생활자들은 총수입의 20%를 집세로 지출해야 할 정도였다
사진설명/ 청계천 일대 (왼쪽만 사용)

#8
당시 주거난은 임대주택 건설에 소극적인


조선총독부의 '무능'과

물가상승이 겹쳤기 때문


사진설명/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

#9
70여년이 흐른


대한민국 서울은 어떻게 변했을까
사진설명/ x

#10
전국 주택 전세거래는 6만여건 감소한 반면
월세(반전세 포함) 거래는 20만건 이상 늘었고
자료: 최근 4년간(2011~2015년) 국토교통부
사진설명/ x

#11
2016년 5월 서울의 전월세거래량의 월세 비중은 45.3%로
3년 전의 33.3%에 비해 크게 증가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진설명/ 2014년 8월 24일, 동탄2신도시 공공분야 아파트 견본주택에 몰린 사람들

#12
월세 강세현상의 원인은
저금리 시대 집주인들이 전세보다 월세를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분석
사진설명/ 마포구 공덕동 공인중개사 사무소

#13
이르면 1~2년 안에 월세가 전세거래를 추월하는
'월세시대'가 온다는 전망도 있는데
사진설명/ 경기도 고양시의 아파트 공사현장

#14
정부는 공공임대주택 건설을 늘리는 등의 대책을 내놨지만
토지와 예산 부족문제로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
사진설명/ 서울 양천구의 한 임대주택

#15
“작금의 경성은 사글세집이 다 나가고 업서서 전세가 엇지나 빗싸전는지”
– 1937년 5월 20일, 매일신보
대한민국의 '전월세 대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취재·구성 이하경
디자인  박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