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다" 병든 문화재 새 생명 불어넣은 '명의'

중앙일보

입력 2016.06.02 13:38

수정 2016.06.1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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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 이상수(1946~98)/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다"


#1
“여기, 이것 좀 보십시오!”
1973년, 경주 155호 신라 고분 발굴 현장
내부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귀금속, 장신구가 쏟아져 나왔다.
사진설명: 경주 155호 고분 발굴현장

#2
유물 가운데 학자들의 눈을 사로잡은 한 폭의 그림

‘천마가 구름을 헤치고 달린다.
목덜미의 갈기와 힘차게 뻗쳐 올린 꼬리털이 바람에 휘날린다.
사지마다에 날개가 달리고 입에서도 힘찬 입김을 느끼게 한다.’
-1973년 8월 25일자 중앙일보

#3
자작나무 껍질을 누벼 만든 화폭에 담긴 생동감 넘치는 말의 모습
국보 207호 ‘천마도’
자작나무판의 균열로 조각난 천마도는
전문가의 손에서 다시 태어났다

#4
1973년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봉황모양 유리병(국보 제193호)도
출토 당시 480개의 조각으로 깨진 유리 더미에 불과했다
사진설명: 경주 황남대총의 73년 당시 발굴장면

#5
이 역시 퍼즐조각을 맞추듯 조각들의 원위치를 찾아내
날렵한 자태의 봉황모양 유리병으로 완성됐다
작업에 걸린 시간은 무려 6년
사진설명: '봉황 모양 유리병'

#6
이렇게 죽어가던 문화재를 살려낸 ‘명의’는 바로
유물복원 1인자로 꼽히는
故 이상수 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장
사진설명: 1980년대 초 '봉황모양 유리병' 조각 붙이는 이상수씨

#7
1970년대 국립박물관 수장고에서 썩고 바스러져가던 유물들
특히 금속류와 회화·목칠기 유물의 상태는 심각했다
사진설명: 국립중앙박물관 제3수장고

#8
당시 대만과 일본에서 각각 보존기술을 익혀온
이상수와 이오희(전 한국전통문화대 석좌교수)
두 사람은 고고유물의 정리실로 쓰려던 박물관 3층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윗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저지른 일이었다
사진설명: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

#9
“청진동에서 해장국에 소주 한 병 시켜 놓고 이상수 선생과 밤새 얘기했어,
가만히 있으면 유물들 진짜 큰일난다고.
술김에 ‘뭐라도 하자’고 약속한 게 지금까지 온 거지.” -이오희
사진설명: -

#10
1974년, 두 사람의 ‘무모한 도전’으로
한국 박물관사(史)에 처음으로 보존처리실이 등장했다
사진설명: 2010년 7월 6일, 조선중기 불상 보존처리 중인 보존과학팀

#11
무령왕릉 출토 유물
감은사터 서탑 출토 사리장치
금령총 출토 말 탄 사람의 토기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금동향로

숱한 국보급 유물이 이상수의 손을 거쳐 원형의 색과 빛깔을 찾았다
사진설명: 기마인물형 토기

#12
그는 찜통의 원리를 이용해 보존처리기술을 개발했다
철기유물을 푹 쪄서 염분을 빼내는 방법은
보존과학 기술이 우리보다 훨씬 앞선 일본에서 도입할 정도
사진설명: 1977년 7월 14일, 신안앞바다 유물발굴 당시 작업 실무책임자였던 이상수

#13
‘옛 장인의 입장에서 당시처럼 작업한다.
처리는 반영구적이므로 한번 실수는 영원하다.
작업 전 작업 내용과 결과를 충분히 검토한다.
복원에 왕도는 없으므로 순리대로 진행한다.’
-1995년 이상수 강의노트 속 ‘보존처리자 4계명’
사진설명: 78년 보존처리한 국보127호 금동관음보살입상

#14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 임시고용원으로 들어와
98년 타계 직전까지 문화재 보존현장을 지킨 이상수
박물관 귀퉁이에서 시작한 보존과학 전문인력은
2016년 현재 30명으로 크게 늘었다
사진설명: 2010년 7월 6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 목재처리실

#15
6천 여 점의 낡고 병든 문화재에 새 생명을 불어 넣은 이상수
그 역시 ‘한국의 국보’가 아닐까.

취재·구성 임서영
디자인 주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