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을 적신 책 한 권] 어둠이 무섭던 분홍날개 꼬마 박쥐…공포와 정면으로 맞서 비로소 비상

중앙일보

입력 2016.05.07 00:31

수정 2016.05.07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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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무서워하는
꼬마박쥐

게르다 바게너 글
E.우르베루아가 그림
최문정 역, 비룡소
81쪽, 8000원

요즈음엔 아이들에게 어떤 책을 읽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럴 때마다 전제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책은 제 자식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억지로 ‘읽힐’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발 읽으라고 눈앞에 가져다 바칠 수는 있겠으나 거기까지가 다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오히려 내 책 읽기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 관심이 없던 그림책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이다. 어른 서재를 놔두고 아이들 방으로 슬그머니 스며들어 그림책 앞에 앉는 일이 잦다. 일을 해야 하는데 잘 되지 않는 밤이라거나, 내가 뭐하는 사람일까 싶어 문득 멍해지는 순간에 말이다. 얼마 전 ‘나는 어떻게 쓰는가’라는 주제로 에세이 마감을 앞두고도 그랬다. 소설이 아니라 사사로운 집안일에 지쳐있는 때에, 소설이라면 한 문장도 마음에 담지 못하는 때에, 내 소설 쓰기 방식에 관하여 정밀하게 고백해야 하다니 곤혹스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있는데 책장에 꽂힌 많은 그림책들 중에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꼬마 박쥐』. 잠들기 전 아이들에게 몇 번 읽어준 적 있는 책이었다. 주인공은 분홍색 날개를 가진 어린 박쥐다. 다른 박쥐들은 모두 검은 날개를 가지고 멀리 날아가지만 그의 날개는 계속 분홍색이다. 이 꼬마 박쥐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어둠 속에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박쥐이지만 실은 어둠을 몹시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꼬마 박쥐는 안 무서운 척 하려고 애쓰지만 소용없다. 동료들이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 버리고 혼자 남게 된 그는 마을에서 가장 용감한 소녀 리자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무서움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되지가 않아. 무서움은 항상 날 따라다녀!” 소녀의 대답은 이것이다. “날아서 도망쳐도, 뛰어도 도망쳐도 소용없어.” 그러고는 박쥐에게 작은 손전등을 하나 건네준다. “이제 제일 어두운 구석으로 가. 그리고 아주 똑바로 유령을 바라봐.”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 실체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수 밖에 없다는 것. 꼬마 박쥐는 용기를 내고, 분홍 날개는 어느새 검은색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제 남들처럼 어른이 된 박쥐에게는 더 이상 손전등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다. 헤어질 때 소녀는 박쥐에게 손전등을 선물하고 박쥐는 비로소 멀리 날아오른다. 그 가느다란 빛줄기에 의지하여 깊고 끝없는 어둠 속으로. 어쩌면 어른이란, ‘그럼에도’ 날아가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의 손전등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정이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