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엔 메이저 브랜드를 인수하면 명품 시장에 진출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브랜드 역사와 한국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결합하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걸로 생각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경험 부족으로 커뮤니케이션 문제와 문화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국내 최대 패션기업인 삼성물산 패션부문 이서현(42) 사장이 공개한 실패 경험담이다. 이 사장은 2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콘데나스트 럭셔리 컨퍼런스’에서 미래의 럭셔리 산업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가 삼성의 경영자로서 공개연설이나 강연을 한 건 처음이다.
첫 공개연설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콘데나스트 컨퍼런스’에서 기조연설“독창적 스타일로 트렌드 선도할 것”“10대 딸과 집에서도 메신저로 대화”
삼성물산은 올 하반기 패스트패션 브랜드 에잇세컨즈의 중국 시장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앞서 1995년엔 삼성디자인예술학교(SADI)를, 2005년부터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를 세워 신진 디자이너도 후원하고 있다.
삼성이 자체적으로 명품 브랜드를 보유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우리가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동안 글로벌 트렌드를 소비하는 데에 열중했고 산업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이젠 우리 스타일과 역사에 자신감을 갖게 된 만큼 독창적인 스타일의 글로벌 트렌드를 이끌어 나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사장은 럭셔리 시장의 변화에 대해선 “럭셔리 소비자가 베이비부머에서 밀레니얼 세대로 바뀌고 있고, 소셜미디어에 익숙한 밀레니얼 세대를 잡기 위해 기업의 마케팅 전략도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개인적인 경험도 언급했다. “패션사업에 몸담은 지 10여 년, 명품 소비자로 지낸 지 20년이 됐다. 예술품 수집가인 조부모님 덕분에 아름다운 작품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관심이 나를 파슨스디자인스쿨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하이패션에 눈뜨게 됐다”고 소개했다. 또 “10대 딸과 주로 메신저로 대화하는데, 심지어 둘 다 집에 있을 때도 메신저를 한다”고 말해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이 사장은 “서울은 화장품과 성형 등 뷰티 산업 기반이 넓고, 수준 높은 정보기술(IT) 인프라가 구축됐고, 세계 최대 중국 시장과 지리적·문화적으로 가깝고, K팝과 K드라마 등 한류에 힘입어 아시아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며 “미래에도 서울은 럭셔리 거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그간 럭셔리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가치(timeless)로 인식돼 왔으나, 이제는 무한한(limitless) 가능성으로 얘기해야 할 것 같다. 빅데이터, 가상현실, 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의 융합과 소셜미디어 덕분에 럭셔리는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는 보그·GQ 등을 발행하는 출판업체 콘데나스트 인터내셔널과 수지 멘키스 보그 인터내셔널 에디터가 주최했다. 30여 개국의 패션업체 경영자, 디자이너 등 500명이 참석했다.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