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4월 24~29일 전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했다. 같은 해 2·12 총선에선 신한민주당이 제1 야당이 됐고,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요구 도 커졌다. 한·미는 4월 초부터 정상 언론발표문(press remarks) 문안을 논의해왔다. 4월 12일 전 대통령은 리처드 워커 주한 미 대사와의 오찬에서 자신의 ‘헌법 수호를 통한 평화와 안정 노력’을 레이건 대통령이 지지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미측은 “내정에 관계되는 부분”이라고 난색을 표했다. 양측은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결국 정상회담일인 26일 레이건 대통령의 발표문에는 ‘호헌’ 대신 “전 대통령이 임기 말에 하겠다는 평화적 정권교체 공약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재차 강조한다”가 들어갔다.
정부, 외교문서 25만 쪽 공개반기문, 미 연수 중 DJ 동향 보고
워커 미 대사는 1월 19일 이원경 외무부 장관을 만나 “김이 선거 후 귀국해 달라는 우리 측 제안을 받아들이면 한국 정부가 사면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22일엔 직접 전 대통령을 만났다.
하지만 이튿날 주한 미 대사관 측은 “전 대통령 예방 결과에 대한 국무부의 1차 반응은 한마디로 대단히 실망했다는 것”이라며 “24일로 예정된 태평양계획의 발표 연기를 검토하고 있다”고 외무부에 밝혀왔다. 태평양계획은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의미한다. 한국 정부가 DJ를 사면하지 않겠다거나 선거 전 귀국 시 재수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당시 참사관으로 하버드대에서 연수 중이던 반기문 현 유엔 사무총장은 1월 7일 “130여 명의 미 인사들이 연서한 김대중의 안전 귀국 요청 서한을 (곧) 대통령 앞으로 보낼 것이라는 정보를 교수로부터 입수했다”고 주미 대사관에 동향 보고를 하기도 했다.
외교문서에는 78년 인도 뉴델리의 베트남 대사관에서 개최된 ‘남북한 및 월맹(베트남) 3자 협상’도 담겨 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 억류된 이대용 공사 등 3명의 석방을 위한 교섭이었다. 북한 은 처음엔 이 공사 등 3명을 1대 70으로, 즉 210명의 남파 간첩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이 공사 등은 스웨덴의 중재로 80년 대가 없이 풀려났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