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립공원에 가보라. 옐로스톤에는 유황천 한가운데까지 길이 있다. 관광객이 보고 싶은 곳일수록, 절경일수록 쉽게 갈 수 있다. 불판, 고기 굽는 시설, 전기까지 다 갖춰놨다. 스위스는 더하다. 모든 산 정상까지 트램이 다닌다. 우리는 어떤가. 절경은 막아놓기 일쑤다. 환경단체가 반대해 케이블카도 못 놓는다. 그러니 몰래 가서 훼손한다. 절경은 건장한 청춘남녀의 전유물이다. 어린이와 노약자는 천왕봉 구경 한 번 못한다. 관광도 죽고 환경도 죽는다. 이런 루저-루저 게임이 없다.”
국토의 70%가 산인데 환경 규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된다. 그걸 지우개로 풀자. 유커 1000만, 2000만 유치에도 도움이 된다. 중국 관광객 어렵게 모셔놓고 보여줄 곳이 없어 명동에서 군것질이나 시키는 게 말이 되나. 뒤에 듣자니 그는 사람 만날 때마다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2년쯤 지나 그는 다른 걸 들고나왔다. 이번엔 ‘정부 역할론’이었다. 예로 든 게 항공기 정비수리(MRO) 산업이다. 역시 거칠게 그의 말을 옮기면 이랬다.
“항공기 MRO는 뜨는 산업이다. 비행기는 한 대에 부품이 600만 개 들어간다. 하나라도 고장 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20년 이상 유지보수가 필요해 한 번 고객을 잡으면 오래간다. 관광 수요가 늘면서 비행기도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 시장 규모는 643억 달러, 2025년엔 960억 달러로 커진다. 이런 산업은 국가가 활주로며 성능시험장 같은 인프라를 깔아줘야 민간이 뛰어들 수 있다. 도로·통신망이 깔려야 자동차·ICT(정보통신기술) 산업이 클 수 있는 것과 같다. 중국·싱가포르는 국가가 나서 대대적인 항공산업단지를 조성 중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뿐이다.”
알아보니 국토교통부는 2014년 2월 “항공기 MRO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며 대통령에게 이미 업무보고를 했다. 그러자 업체 두 곳이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유치전에 나섰다. 하지만 국토부는 2년이 넘도록 묵묵부답이다. 지자체 간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자 청와대와 정치권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국내 저비용항공사(LCC)는 정비불량으로 회항·결항을 밥 먹듯 하고 있다. 국내 기술·장비·인력이 달려 해외에 정비를 맡기느라 쓴 돈만 2014년 7560억원이다. 새 국가 먹거리로 항공기 MRO를 개발하기는커녕 돈과 안전을 다 잃고 있는 것이다.
이 부회장의 말을 장황하게 옮긴 건 총선이 끝났기 때문이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나 규제 프리존 특별법은 대표적인 지우개법이지만 19대 국회는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타당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고 야당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좋은 길을 놔두고 한국 경제는 굳이 험한 길로 돌아가는 중이다. 선거 때문에 미루고 선거 끝나서 안 하고…. 20대 국회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부라고 다를까. 환경부는 11일 전기차 충전을 유료화했다. 요금도 1kwh당 313.1원으로 싸지 않다. 보조금도 줄이고 충전기 지원금도 삭감했다. 민간 사업자 육성이 명분이지만 그 전에 국내 전기차 산업이 먼저 말라 죽을 판이다. 한국은 그러잖아도 충전기 1대를 17.5대의 전기차가 쓰고 있다. 미국의 전기차 2대당 충전기 1대와는 비교도 안 된다. 미국의 테슬라라도 이런 낙후한 인프라로는 ‘모델3’ 프로젝트 같은 창조·혁신을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그렇게 지우개는 국회에서 막히고 정부는 제 역할이 뭔지조차 모른다. 중간에 낀 경제만 죽어나고 있다. 국회 탓만 하는 정부, 정부 탓만 하는 정치가 만들어낸 정치 과잉의 자화상이다. 총선은 끝났다. 그렇다고 지우개가 살아나고 전기차가 쌩쌩 달릴 것 같진 않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