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로 다가온 4·13 20대 국회의원 선거는 예사롭지 않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가운데서 치러지게 될 것 같다. 힘의 균형이 바뀌는 근래의 국제 정세와 강대국 관계는 우리의 안보 환경에 극심한 불안정을 초래하고 있다. 한편 냉전 종료 후 시장의 세계화로 고도성장이 계속되던 세계 경제가 저성장과 불황의 늪으로 빠져드는 징조가 날로 확연해지고 있으며 한국 경제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에 더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앞세운 북한의 극단적 모험주의 도박은 민족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비상사태에 이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수천 년 민족사에서 갖가지 위기를 겪어 온 우리 국민이기에 과도하게 흥분하거나 당황하기보다는 이러한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체제 정비의 계기와 리더십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시대적 난제들과 부딪쳐 나갈 우리나라의 건강상태가, 특히 기초체력이 너무나 허약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자각 진단은 이미 국민적 합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참여와 그들의 의사를 국정으로 연계시키는 국회와 정당에 대해 여야, 보수와 진보, 계층, 지역 등을 넘어선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에 더해 지금의 국가 운영의 효율성에 대한 국민적 평가 역시 실망과 체념 사이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국민적 우려에 보수 및 진보언론의 논조나 사설이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지금의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광범위한 실망을 방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국가의 건강검진인 총선을 앞두고 부질없는 상호 비방이나 비판보다는 국민의 주권의식을 국가 운영체제의 구조적 개혁으로 연계시켜야겠다는 반성과 의욕이 팽배하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국민의 권리와 책무를 새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시점에 헌법이 명시한 나라의 주인인 ‘우리 한국 국민’이 서 있는 것이다. 마침 한국과 일본의 민주헌정체제 수립 과정에 대한 비교연구인 『우리 국민 만들기(Making We the People)』가 연세대 김성호·함재학 두 교수의 공저로 케임브리지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됐다. 이 저서의 뛰어난 연구 성과 가운데서 특히 다음의 두 논점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첫째, 특정한 시기에 헌법을 제정한 주체, 예컨대 제헌국회를 들 수 있지만 민주헌정체제에서의 ‘우리 국민’은 언제나 헌법을 지키고 다듬어 고쳐 나가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헌법 제정이 자율적이었느냐 타율적이었느냐는 것은 헌법 규범에 당위성을 부과하는 중대한 요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끄는 지금의 일본 정부와 집권 자민당은 1945년에 제정된 이른바 ‘평화헌법’을 점령군인 미국 등이 패전국 일본에 타율적으로 수용시킨 것이기에 오늘의 ‘우리 일본 국민’은 보통국가에 걸맞은 자율적 헌법 개정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경우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의 핵심인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라는 국민적 의사를 공식 계승해 1948년의 자유선거로 선출된 제헌국회가 자율적으로 제정한 대한민국 헌법에 의거해 운영되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동안에 있었던 몇 번의 헌법 개정은 1960년 4·19의거나 1987년 6월항쟁과 같은 민주 회복을 위한 ‘우리 한국 국민’의 주권의식이 발동한 보완작업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28년 전에 출범한 87년 체제의 국민 참여나 국가 운영의 효율성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품고 있다면 우리 국민은 피할 수 없는 국가 건강 회복을 위한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
이홍구 본사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