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리 예술마을은 통일동산 안에 있다. 통일동산은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이 제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따라 평화시 건설 구상의 일환으로 조성된 단지다. 헤이리는 예술이 주는 조화와 감동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첫 삽을 뜬 예술마을이지만 남북관계가 얼어붙은 요즘 설립 이래 가장 을씨년스러운 봄을 맞고 있다.
‘실과 빛-관계의 시작’전
‘실과 빛-관계의 시작’전에 나온 작품들 역시 그런 가족사적 아픔을 은근히 드러낸다. 형광 실을 사용하는 그에게 실은 본질적으로 모든 소중한 관계를 이어주는 끈을 의미한다. 평생 한 번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와 북의 혈육은 핏줄로 이어져 있다. 이런 가족의 끈은 인위적으로 끊을 수 없고 끊어서도 안 되는 소중한 것이다.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 관계의 끈은 다양한 공동체와 집단·사회로 이어진다. 우리 모두는 이 보이지 않는 실에 의해 다채롭게 연결돼 있다. 때로는 이 실이 복잡하게 엉켜 우리를 괴롭힌다. 그대로 자르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다. 어렵더라도 관계의 끈은 끈기 있게 풀어가야 한다. 수백 개의 실패로부터 풀려 나온 실이 여기저기 엉켜 있는 ‘실풀이’는 그 지혜에 대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투명한 폴리에스테르 의자 600개를 쌓아 커다란 문의 형태로 제작한 ‘소통의 의자’는 작은 단위가 모여 하나의 큰 구조를 이루는 조형물이다. 이 조형물에도 수많은 실이 부착돼 마치 섬세한 신경이나 혈관이 내재돼 있는 인상을 준다. ‘ㄴ ㅏ ㄴ ㅓ(나, 너)’ 역시 투명한 폴리에스테르로 만든 한글 자모 조형물 안에 관계를 상징하는 실이 물결처럼 흐르고 있다.
이은숙의 작품은 이처럼 우리가 본질적으로 ‘관계의, 관계에 의한, 관계를 위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더불어 제아무리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다 해도 남북을 잇는 가장 근원적인 끈인 핏줄의 끈은 결코 끊을 수 없고 끊으려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깊이 되새기게 한다.
이주헌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