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문에 치른 대가는 혹독하다. 프라이버시를 완전히 저당잡힌 것. 『프라이버시를 팝니다』라는 책이 세간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20년 전의 일이다. 보험회사, 제약회사, 보신용 식품업체들은 환자들의 병원 기록에 특히 눈독을 들이고, 신용업체가 수집한 금융거래 기록은 은행이나 대부업체들의 영업자산이다. 여기에 개인의 e메일과 SNS가 파헤쳐지면 개인이 설 자리는 없다. 현대판 유배, 사이버 위리안치가 따로 없다. 조선시대 가택연금용으로 쓴 탱자나무가 오늘날은 각종 개인정보로 바뀌었을 뿐이다. ‘꼼짝마라’다.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는 고립하여야 한다’는 박인환의 시(詩)는 엄살이 됐다. 사이버 위리안치는 절대로 고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국제적 관심을 모았던 대한민국 국회의 마라톤 필리버스터의 초점은 국정원이었다. 테러 위험인물에 대한 포괄적 감시 권한을 국정원에 부여했기 때문이다(제9조). 필리버스터는 국정원 성토대회였다. 독재시대 고문과 수감생활을 견뎠던 은수미 의원의 호소는 울림이 컸다. 법조문에 명기되지 않았지만 ‘대테러센터’가 국정원 휘하에 들어갈 게 분명한 상황에서 당연히 터져나올 만한 우려였다. 국정원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여전히 바닥이다. 국정원 소속 정보원이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같다면 분위기는 달랐을 것이다.
영국 비밀정보국(SIS) 소속 대테러 요원 제임스 본드는 용맹하고 충직한 데다 섹시남이다. 그는 주로 소련 첩자나 이슬람 과격분자를 소탕한다. 기상천외의 첨단무기로 상상력을 뒤엎는 통쾌한 장면을 연출하는 섹시남을 누가 사랑하지 않을까. 게다가 미인 본드걸들의 유혹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속한 MI6 대외정보국은 최첨단 장치를 활용해 용의자의 도·감청은 물론 암호까지 척척 해독한다. MI6가 국내 보안국인 MI5와 합동작전을 펼치면 감당할 자가 없다. 그들이 국내 정치계, 저항인사, 시민단체를 감시하고 싶은 욕망과 개연성은 충분하겠는데 실제로 그랬다는 보도는 아직 들어본 바 없다. 제임스 본드는 영국의 안전과 영국민의 보호를 위해 세계를 휘젓고 최고의 기량을 뽐낼 뿐이다.
국정원이 과거의 때를 벗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국민의 신뢰를 회복한 군부만큼은 아니다. ‘테러방지법’은 수사권을 뺀 정보수집 권한에 한정하고 감청 영장을 받도록 해 악용 소지를 줄였지만, 전방위적으로 활약할 국정원을 감독하고 견제할 기관이 마땅찮다는 점이 문제다. 국가테러대책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총리의 감독과 인권보호관의 간섭을 받도록 명시돼 있으나 국정원장을 감히 건드릴 간 큰 사람이 있을까. ‘누가 권력자를 감독할 것인가’라는 고질적인 정치학적 난제가 여기에 있다.
제9조 수행 과정에서 혹시 무고한 시민이 혐의를 쓸 경우 위법성과 부당성을 다툴 수 있는 구제대책이 없는 것이 그런 난제 중 하나다. 대테러센터에 배치될 수백 명의 정보원이 법과 양심의 영역 내에서 활약한다면 누가 우리의 제임스 본드를 두려워하랴. 그렇게만 한다면, 정보기술의 꽃인 사이버수사와 해킹에 열광하고 리니지 게임에 몰입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국정원 첩보원은 최고의 인기 직업이 될 텐데 말이다. 그러나 아직 환골탈태하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국정원을 누구나 두려워하는 게 오늘날 한국이다. ‘테러로부터의 안전’을 구매한 그 비싼 비용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