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벤의 시곗바늘이 오후 6시15분을 가리키면, 짙푸른 런던 하늘에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빅벤은 영국 국회의사당의 시계탑으로 157년째 15분마다 종을 울리고 있다. 템스강 골든 주빌리 다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거리 모퉁이 펍마다 갓 퇴근한 직장인들이 모여들어 시끌시끌하다. 손엔 하나같이 맥주잔이 들려있다. 표정이 달빛만큼 환하다. 하루의 무게마저 날려버린 듯.
‘하루의 마무리 = 펍에서 맥주 한잔’은 런던 사람들에겐 오래된 습관 같은 일상이다. 런던에 성업 중인 펍만 자그마치 7000여 곳. 대부분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역사가 깊다. 웬만한 펍 문을 열고 들어서면 100년, 200년 전 풍경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셰익스피어의 단골 펍이었던 ‘조지 인(The George Inn)’처럼 500년은 넘어야 오래됐노라 명함을 내밀 수 있다. 그러니까 소설가 찰스 디킨스, 조지 오웰이 드나들던 곳에서 맥주 한잔 하고 싶다면, 골목 안 오래된 펍으로 스며들면 된다.
올드 킹스 헤드(Old King's Head), 크로스 키(The Cross Key), 로즈 앤 크라운(Rose & Crown) 등 펍 이름이 암호명 같은 곳도 많다. 구분법은 간단하다. 왕이나 여왕의 얼굴, 장미와 왕관 등 그림간판이 걸려있다면 대부분 펍이다. 문맹이 많던 중세 시절 그림만 보고 알 수 있도록 큼직한 그림을 간판으로 내건 전통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기 때문. 거리를 걷다 펍 간판을 살펴보는 일 또한 런던 여행의 소소한 재미다.
조지 오웰은 『물에 잠긴 달(The Moon under water)』이란 에세이에서 ‘완벽한 펍이란 손님의 이름과 취향을 기억하는 바텐더와 맛있는 맥주, 빅토리아풍 인테리어를 갖춘 곳’이라고 했다. 아, 얼마나 멋들어진 조건인가. 낯선 이방인의 이름을 불러줄 바텐더는 없겠지만, 완벽한 펍을 찾아 코벤트 가든 근처 램 앤 플래그(Lam & Flag)에 도착했다.
펍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고풍스러운 벽난로 등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실내장식이 푸근하게 느껴졌다. 친구와 런던 프라이드(London Pride)와 ESB(Extra Special Bitter)를 한 잔씩 사 들고 자리를 잡았다. 150여 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여기서 맥주를 홀짝인다면, 작품 구상 중인 찰스 디킨스를 엿볼 수 있으리란 상상만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1623년에 문을 연 램 앤 플래그는 찰스 디킨즈가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를 구상한 곳으로 알려졌다.
이름처럼 빅토리아 여왕도 목을 축이고 간 펍으로도 유명하다. 빅토리아 여왕은 무슨 맥주를 마셨을까 궁금해하며 황금빛 올리버 아일랜드 골든 에일(Oliver's island golden ale)을 한 모금 넘겼다.
빅토리아를 나서는 길,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작은 초록색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이런 글귀가 분필로 쓰여 있었다.
‘우리 펍으로의 여행은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A Trip to our pub is an experience that chalk is unable to con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