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시각각

[박재현의 시시각각] 우병우 민정수석 힘이 작용했나

중앙일보

입력 2016.02.13 00:01

수정 2016.02.13 20:37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박재현 논설위원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과 최윤수 국정원 2차장의 인연은 1984년 서울법대에 입학하면서 비롯된다.

 경북 봉화 출신으로 영주고를 나온 우 수석은 대학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같은 학번의 한 법조인은 “우병우는 1학년 때부터 상당히 논리적이고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최 차장은 부산 내성고를 나왔지만 본적은 경북 김천이다. 말수가 적었고 평범한 학생 중 한 명이었다. 학창 시절 두 사람의 관계는 동기에 불과했다.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도 우 수석은 꿋꿋이 도서관 자리를 지키며 대학교 3학년 때인 1987년 약관의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90년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초임 검사 시절 우 수석은 시보(試補)로 온 대학 동기들에게 “김 시보” “박 시보” 등으로 부르며 군기를 잡았다고 한다.

국정원 2차장 임명 놓고 뒷말 계속
30년간 우정이 인사에 영향 준 듯

 최 차장은 2년 늦게 사시에 합격한 뒤 1년간 변호사로 있다가 94년 수원지검 검사로 임용됐다. 이때 우 수석도 경주와 밀양을 거쳐 수원지검으로 전보된다. 두 사람은 같은 건물에 근무하면서 속마음을 튼 것으로 전해진다. 경북 출신의 A검사가 합류하면서 세 명은 의기투합했다. 당시 검찰 문화에서 흔했던 ‘스폰서’도 없이 골프 라운딩도 간간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 수석의 장인은 기흥CC의 오너를 지냈고, 그가 상속받은 재산은 400억원대다. 가끔 A검사의 인척이 라운딩을 주선하기도 했다.

 2009년 5월 우 수석이 대검 중수부 1과장으로 있으면서 담당했던 ‘박연차 게이트’로 인해 두 사람은 검사 생활에서 최대 위기를 맞는다.

 먼저 최 차장에게 불똥이 튀었다. 우 수석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지면서 역풍을 맞게 된다. 그의 수사 방식을 놓고 정치적 논란이 인 것이다. 그는 임채진 총장 후임으로 온 김준규 총장의 배려로 대검 범죄정보기획관과 수사기획관을 거치며 기사회생하는 듯했다. 하지만 검사장 승진 인사에서 연거푸 물을 먹게 된다. 노 전 대통령 자살이란 그림자까지는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부천지청장을 거쳐 한직인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밀려난다.


 최 차장은 대검 조직범죄과장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을 거치고도 이례적으로 법무연수원으로 튕겨간다. “최윤수가 검찰총장에게 찍혔기 때문”이라는 수군거림이 나왔다.

 2012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두 사람은 법무연수원에서 재기를 노리며 와신상담의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우 수석은 “조직이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며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되고, 최 차장은 전주지검 차장검사로 임명된다.

 지난해 1월 우병우가 민정비서관에서 민정수석으로 승진하고 한 달 뒤 최 차장은 서울중앙지검 3차장 자리를 꿰찬다. 그러고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 원인이 된 자원개발 비리, 포스코 수사를 진두지휘한다. 청와대 하명에 따른 부실수사 논란 속에서도 최 차장은 그해 말 검사장급으로 승진하고 두 달 만에 다시 국정원 2차장 자리로 갈아탔다.

 공안 수사 경력이 전무한 그가 국정원의 국내파트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우 수석의 ‘인사전횡’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야당 등에선 우려를 표명하는 성명까지 나왔다. 검찰 소식에 밝은 한 법조인은 “아마도 두 사람이 이 정부의 순장조가 되기로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우 수석이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신뢰를 받는 것은 사심 없는 업무처리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인사는 어딘지 모르게 찜찜할 뿐이다.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