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⑤ 예수는 왜 사람을 낚으라고 했을까

중앙일보

입력 2016.02.03 00:02

수정 2016.02.0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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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텄다. 갈릴리 호숫가로 갔다. ‘이토록 삭막한 땅에 어떻게 이토록 큰 호수가 있을까.’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었다.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이 차가웠다. 느껴보고 싶었다. 2000년 전 예수도 맛 보았을 호수의 숨을 말이다. 예수는 이 주변을 걷다가 어부들을 만났다.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였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복음 4장19절)


그 말을 듣고 둘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고 있다. 예수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한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 의미를 묻듯이 바라보고 있다. 두초 디 부오닌세냐의 1308~11년작 ‘베드로와 안드레의 부르심’.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발바닥에 뭔가 밟혔다. 미끈했다. 돌멩이 같았다. 손으로 집었더니 조개였다. 유대인은 율법에 따라 조개를 안 먹는다. 조개뿐만 아니다. 새우와 오징어 등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수산물도 먹지 않는다. 또 발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동물의 고기만 먹는다. 그래서 돼지고기는 안 먹는다. 유제품을 먹을 때도 엄격하다. 치즈와 버터, 우유 등 소에서 나오는 유제품은 쇠고기와 함께 먹을 수가 없다.

아침에 숙소에 차려진 간단한 뷔페 식단도 그랬다. 요구르트와 치즈, 우유는 있었지만 쇠고기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저녁 식단은 그 반대였다. 쇠고기는 있지만 우유나 치즈는 없다. 이런 식으로 지켜야 하는 유대인의 율법이 무려 613개다. 그래서일까. 호수 바닥에는 조개가 지천이었다. 조개 껍질을 손으로 문질렀다. 무슨 뜻일까. ‘사람 낚는 어부(Fishers of men)’. 예수가 말한 ‘사람을 낚다’의 의미는 대체 뭘까.
 

예수 곁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서 있다. 야고보가 무릎을 꿇고 있고,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 요한이 뒤를 따르고 있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그들이 버린 그물은 무엇이었을까. 마르코 바사이티의 1510년작 ‘제베대오의 아들들을 부르심’. 베니스 아카데미 미술관 소장.


도식적으로 풀면 간단하다. 전도를 많이 하고, 선교를 많이 해서 교회 신자 수를 늘리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게 ‘사람 낚는 어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ㆍ둘ㆍ셋 세면서 ‘내가 전도한 숫자’에 열을 올린다. 훈장이라도 세듯이 말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정해진 숫자를 채우는 게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필수조건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었을까.

호수의 물결이 무릎에서 찰랑거렸다. 곰곰이 생각했다. 갈릴리 호수에 처음 나타난 ‘사람 낚는 어부’는 누구였을까. 그랬다. 그건 예수였다. 예수야말로 그런 어부였다. 그럼 예수는 어떻게 고기를 잡았을까. 그의 그물은 어떻게 생겼을까. 성서에는 ‘예수의 낚시법’이 비유적으로 표현돼 있다. 예수는 말한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장4절) 그게 예수의 낚시법이다.
 

갈릴리 호수에 파도가 치고 있다. 이곳에서 물고기를 낚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사람을 낚으라”고 말했다. 우리는 묻게 된다. 인생에서 내가 낚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건지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낚는 어부인가.


겉으로만 보이는 예수가 다가 아니다. 예수의 주인공은 ‘신의 속성’이다. 그 속성이 말한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그렇다. 신의 속성은 지금도 거(居)한다. 차별 없이 내리는 햇볕처럼. 내 안에도, 당신 안에도, 우리 안에도, 그들 안에도 거한다. 왜 그럴까.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우주에 한 치의 틈도 없이 신의 속성은 가득하다. 그 ‘하나’뿐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하느님을 ‘하나님’이라 부른다. 오직 그 하나만 있으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정말 하나라면 예수가 굳이 낚시를 할 이유는 없다. 모두가 하나인데 굳이 그물을 던질 까닭도 없다. 그런데 예수는 그물을 던졌다. 왜 그럴까. ‘착각’ 때문이다. 하나인데 하나인 줄 모르는 우리의 ‘착각’ 때문이다. ‘신의 눈’이 ‘에고의 눈’으로 바뀌면서 생겨난 거대한 착각이다.


예수는 그 착각을 깨라고 했다. 그걸 깨기 위해 눈을 바꾸라고 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에고의 눈’을 ‘신의 눈’으로 바꾸려면 우리가 거하는 곳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배를 저으라고 했다. 깊은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물을 내릴 장소를 바꾸라고 했다.

샤갈은 “젊었을 때부터 나는 ‘성서’에 사로잡혔다. 성서는 내게 가장 위대한 시정(詩情)의 원천이다”고 말했다. 하느님이 방금 창조한 아담을 천사가 안고서 날고 있다. 샤갈은 유대교인이었다.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그려져 있다. 샤갈의 열린 마음이 보인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 ‘인간창조’. 프랑스 니스 박물관 소장.
 


하느님이 인간을 지을 때는 달랐다. 그때는 하나였다. 하느님이 아담 안에 거했고, 아담이 하느님 안에 거했다. 둘의 속성은 하나였다. 그때는 ‘착각’도 없었다. 선악과를 먹으면서 틈이 생겼다. 아담은 더 이상 하느님 안에 거하지 않았다. 대신 ‘나’라는 에고 속으로 거했다. 그때부터 아담은 ‘신의 눈’이 아니라 ‘에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눈이 바뀌자 에덴 동산도 사라졌다. ‘하느님 나라’가 사라졌다. 에덴 동산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아담과 이브가 산 넘고 물 건너 거주지를 옮긴 게 아니다. ‘신의 속성’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아담은 에덴에서도 벗어났다. 속성이 같으면 하나가 되고, 속성이 다르면 둘이 된다. 그게 추방이다. 그러니 에덴동산이 그 옛날 아프리카의 어디쯤이니, 아시아와 유럽의 어디쯤이니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담과 이브는 신의 속성을 잃을 때 낙원을 보는 눈도 잃었다. 어쩌면 우리는 낙원에 살면서도 낙원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사쵸디 산 지오바니의 1427~28년 작 ‘낙원에서의 추방’.

 
만약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가 추방 당하지 않고 계속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낙원의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신의 눈’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에덴의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마음의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마태복음 4장17절)


그게 예수의 낚시다. ‘사람 낚는 어부’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 나의 눈을 덮고 있는 ‘에고의 비늘’을 벗기고, 태초의 아담이 가졌던 ‘신의 눈’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니 전도를 많이 해서 우리 교회 신자 수를 늘리는 걸 ‘사람 낚는 어부’와 동일시한다면 곤란하다. 그건 예수의 뜻을 너무 얕게 해석하는 셈이다. 그보다는 스스로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진정으로 예수에게 낚였는가. 다시 말해 나는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나. 나의 눈인가, 아니면 신의 눈인가. 그걸 물어야 하지 않을까.

갈릴리 호숫가는 아름답다. 꽃과 풀과 나무가 생기를 뿜어낸다. 예수는 저 어디쯤으로 배를 저어가라고 했을까.


갈릴리 호숫가를 걸었다. 산책로가 좋았다. 한 바퀴 도는 데만 63㎞다. 자전거를 빌리면 하루 코스다. 예수는 갈릴리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다. 이곳에는 어부들이 많았다.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에게 모였다.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예수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았다. 그 장소가 여기 어디쯤이었을까. 예수는 배에 올라타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뒤, 배를 설교단 삼아 가르침을 펼쳤다.(누가복음 5장3절) 설교를 마쳤을 때 예수가 시몬에게 말했다.

“깊은 데로 저어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누가복음 5장4절) 한글 성서에는 이렇게 번역돼 있다. 신약성서는 처음에 그리스어로 기록됐다. 그리스어를 영어로 직역한 성서는 더 구체적이다.

“Back up into the depth, and lower your nets for a catch.(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그리고 그물을 내려서 잡아라)”(누가복음 5장4절)

예수는 말했다.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예수는 왜 “깊은 곳으로 가라”고 하지 않고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을까. ‘돌아오다’는 그리스어로 ‘epanago(에파나고)’다. 그곳은 어디일까. 혹시 우리는 한때 그곳에 머문 적이 있었던 걸까. 그래서 예수는 “다시 돌아오라”고 한 걸까.
 

예수가 말한 ‘깊은 곳’은 멀지 않다. 그것은 ‘내 안’에 있다. 그러니 언제든지 배를 저어서 갈 수가 있다. 라파엘로 산치오의 1515년작‘고기잡이 기적’.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 소장.


바람이 불었다. 고개를 들었다. 푸른 호수에, 푸른 하늘에, 푸른 바람. 가슴이 탁 트였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 저 어디쯤으로 배를 옮기라고 했을까. 성서에는 배를 옮겨 그물을 내렸더니 물고기가 한가득 잡혔다고 기록돼 있다. 그럼 예수는 단지 고기 잡는 포인트를 알려 준 걸까. 그뿐일까. 그리스어 성서에서 ‘깊은 곳’에 해당하는 단어는 ‘바소스(Bathosㆍβαθοζ)’다.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는 ‘바소스’라는 단어에 ‘바닥이 없는 심연’이란 뜻이 있다고 했다.

그럼 예수는 왜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한 걸까. 그리고 거기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을까. 예수가 말한 ‘깊은 곳’은 대체 어디일까. 호숫가 언덕의 풀밭에 앉았다. 세상 모든 것에는 ‘바닥’이 있다. 끝이 있다. 다시 말해 유효기간이 있다. 길바닥의 돌도, 거리의 나무도, 하늘의 해도, 밤이 되면 솟는 달도, 인간의 육신도 다 유효기간이 있다. 시간이 다하면 소멸하게 마련이다. 그럼 바닥이 없는 건 대체 뭘까.
 

마르크 샤갈의 1933년 작 ‘고독’. 한 유대인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그는 자신의 심연으로 찾아가는 중일까. 바닥이 없는 하늘에서 천사가 날고 있다.


“깊은 곳으로 가라”는 예수의 말을 듣고 시몬(베드로)이 답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누가복음 5장5절) 그렇다. 우리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린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그물을 내린다. 돈을 건지고, 명예를 건지고, 권력을 건진다.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한다. 그런데 그 모든 물고기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결국 소멸하고 만다. 그러니 밤새도록 그물을 내리고, 밤새도록 그물을 올려도 허전할 뿐이다. 결국 알게 된다. 시몬(베드로)의 말처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불교에서는 그런 물고기를 ‘색(色ㆍ물질과 감정)’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색(色)을 붙들지 마라”고 한다. 모든 물고기는 사라지는 법이니까. 그래도 우리는 ‘색(色)’을 움켜 쥔다. 그게 전부라고 여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 놈의 물고기(色)는 잡으면 사라지고, 잡으면 사라지고, 잡으면 또 사라진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세게 거머쥔다. 물고기가 사라지면 다른 물고기를 찾고, 사라지면 또다른 물고기를 찾는다. 결과는 똑같다. 결국 한 마리도 잡을 수가 없다. 대신 ‘사라지는 물고기’의 정체를 뚫으면 달라진다. 공(空)이 드러난다. 아무 것도 없는 공이 아니다. 이 우주를 다 채우는 공이다. 거기에는 소멸이 없다.

예수는 깊은 곳으로,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오라고 했다. 거기가 어디일까. 이 우주를 통틀어 바닥이 없는 곳은 딱 하나다. ‘없이 계신 하느님.’ 거기에는 바닥이 없다. 그게 바로 ‘신의 속성’이다. 예수는 “거기로 가라”고 하지 않았다. “거기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거기서 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아들이다. 하느님이 코숨으로 ‘신의 속성’을 불어넣은 아담의 자식이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 안에 잠자는 심연으로, 신의 속성으로, 그 깊디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하느님은 코숨으로 아담에게 ‘신의 속성’을 불어넣었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의 일부.
 


예수 당시 갈릴리 호숫가에는 소외된 사람들이 있었다. 아픈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 이스라엘은 폭염이 작열하는 사막 기후다. 물도 충분하지 않다. 갈릴리 호수의 풍성한 자연 자체가 그들에게는 둘도 없는 요양지였을 터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병을 죄와 연결해서 받아들였다. 특히 한센병(나병)은 더 그랬다. 자신의 큰 죄로 인해 큰 병에 걸렸다고 여겼다.

예수가 갈릴리에 있을 때였다. 온몸이 나병에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말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5장12절) 예수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댔다. “내가 원한다. 깨끗하게 되어라”(누가복음 5장13절) 성서에는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누가복음 5장14절) 고 기록돼 있다.

사람들은 따진다. 예수가 실제 이적을 행했는가, 아닌가. 말 한 마디로 병을 낳게 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그게 의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일인가. 그렇게 이 스토리의 사실 여부를 따진다. 또 다른 사람들은 무작정 믿는다. “예수님은 신의 아들이니 못할 일이 뭐가 있겠나. 하고자 한다면 뭐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니 내게 병이 생길 때도 기도를 하고, 내게 힘든 일이 생길 때도 기도를 한다. 그 분은 다 해결할 수 있으신 분이니까.”

중국 쑹산의 소림사 맞은 편에 있는 이조암. 혜가는 이곳에 머물며 법을 펼쳤다. 승찬은 아픈 몸을 이끌고 이곳으로 혜가를 찾아왔을까. 그들이 문답을 주고 받은 게 이곳이었을까.


중국 양나라 때였다. 인도의 달마(達磨)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중국 선불교를 창시한 초조(初祖)다. 달마는 깨달음의 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했다. 그가 중국 선불교의 이조(二祖)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혜가를 찾아왔다. 온몸이 곪은 한센병 환자였다. 그가 말했다. “전생에 큰 죄를 지어서 이 몹쓸병에 걸렸습니다. 부디 저의 죄를 소멸해 주십시오.” 당시 중국 사람들도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큰 병에 걸린다고 여겼다. 달마가 답했다. “그럼 너의 죄를 내놓아라. 내가 그 죄를 없애주겠다.”

이 말을 들은 방문객은 얼마나 기뻤을까. 아니, 죄를 내놓기만 하면 없애준다니 말이다. 어떻게 지었는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전생의 죄를 한 방에 소멸해 준다니 말이다. 그는 뒤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채우고 있는 ‘죄‘를 뒤졌다. 그저께도, 어제도, 오늘도 죽도록 자신을 괴롭히는 ‘내 안의 죄’를 뒤졌다. 그걸 찾아야, 그걸 내놓아야 죄가 소멸될테니 말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손만 내밀면 닿던 죄, 눈만 뜨면 보이던 죄, 고개만 돌리면 마주치던 죄였다. 그런데 잡히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죄’가 있는데 거머쥘 수가 없었다. 꺼낼 수가 없었다. 보여줄 수가 없었다. 방문객은 생각했을 터이다. ‘왜 그럴까. 내 안에 분명 있는데 왜 잡을 수가 없는 건가. 왜 끄집어 낼 수가 없는 건가.” 그 순간 그는 당황했을까. 아니면 실망했을까. 아니면 절망했을까. 죄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며 낙심했을까.

방문객이 말했다. “죄를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혜가가 답했다. “네 죄가 이미 없어졌다.” 혜가의 답은 충격이었다. 방문객은 크게 깨달았다.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다니던 죄의식이 우르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왜 그랬을까. 방문객은 왜 죄를 찾을 수 없었고, 혜가는 왜 죄가 없어졌다 말했고, 다시 방문객은 크게 깨쳤을까. 도대체 혜가의 눈에는 죄가 어떻게 보였던 걸까.
 

중국 선불교의 삼조가 된 승찬 선사가 수행했던 동굴. ‘三祖洞(삼조동)’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방문객의 이름은 ‘승찬(僧璨)’이다. 그는 달마와 혜가의 뒤를 이어 중국 선불교의 삼조(三祖)가 됐다. 혜가는 “네 죄가 이미 없어졌다”고 했다. 그 말끝에 승찬은 ‘죄의 정체’를 꿰뚫었다.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의식도 ‘색(色)’이다. 모든 색은 비어 있다. 그게 색의 정체다. 그걸 꿰뚫으면 공(空)이 드러난다. 승찬은 ‘죄의식’이란 물고기를 잡고 있다가, 물고기의 몸체가 비어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죄의식이 소멸된다. 그게 공(空)의 힘이다. 치유의 힘이다.

승찬 선사는 ‘불교 시(詩)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저서 『신심명(信心銘)』을 남겼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마음과 맺어져 평등하면/지은 바가 함께 쉬도다.(契心平等 所作俱息)’그 마음이 뭘까. 이 우주에 가득한 ‘바닥 없는 마음’이다. 그 마음과 맺어지는 게 뭘까. ‘신의 속성’과 맺어지는 거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했다.
 

사람들이 지붕을 열어서 중풍환자를 내리고 있다. 그들의 정성과 믿음을 본 예수는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말했다.
 


평상에 실린 중풍환자가 예수를 찾아왔다. 예수 주위에 군중이 몰려 있었다.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환자를 내렸다.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알아차렸다. 예수가 중풍환자에게 말했다.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누가복음 5장20절) 혜가 선사의 어법으로 하면 “네 죄가 이미 없어졌다”쯤 된다. 이걸 본 율법학자들이 수군거렸다. “저것은 신성모독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누가복음 5장21절) 그들의 생각을 읽은 예수가 받아쳤다. “이제 인자(人子ㆍ사람의 아들)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누가복음 5장24절)

예수의 주인공이 뭘까. 인자(人子)의 주인공이 뭘까. ‘신의 속성’이다. 거기서 거대한 포맷이 일어난다. 우리가 틀어쥔 모든 색(色)들, 집착들, 죄의식들이 ‘신의 속성’ 안에서 ‘0’으로 포맷된다. ‘공(空)’으로 포맷된다. 그것이 죄사함이다. 그게 신의 속성이 품고 있는 ‘무한 치유력’이다. 예수는 거기로 들어오라고 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그게 ‘사람 낚는 어부’에 담긴 깊은 뜻이다.

갈릴리 호수의 선착장에 섰다. 끼룩끼룩. 갈매기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예수는 말했다.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거기서 그물을 내려라.”
 

예수는 ‘깊은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곳이 어디일까. 갈릴리 호수의 저 어디쯤일까. 아니면 온갖 파도를 잠재우는 내 마음의 심연일까.


예수가 말한 ‘깊은 곳’은 갈릴리 호수의 어딘가가 아니었다. 저 푸른 파도의 어디쯤이 아니었다. 그 곳은 ‘신의 속성’이 잠들어 있는 우리 안의 심연이다. 그 깊은 마음의 골짜기다. 우리가 다시 돌아갈 고향이다. 거기서 그물을 내려야 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런데 심연이 어디야? 그걸 알아야 갈 것 아닌가.” 답은 어렵지 않다. 나의 고집이 무너지는 곳. 거기가 바로 심연이다. 고집에 가려서, 에고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내 안의 ‘깊은 곳’이다. 거기서 치유의 비가 내린다.

<다음주는 연재를 쉽니다. 6회에서 계속 됩니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