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래 최대 사건으로 꼽힌 외환위기가 벌써 20년 전의 일이 됐다. 원인은 한둘이 아니지만, 하기에 따라선 막을 수 있었다는 데는 이론이 많지 않다. 파국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각종 개혁 정책들은 여야 정쟁 속에 국회에서 멈춰 섰다.
그때 국제 금융계에선 한국에 대해 “말은 많은데, 행동은 없다(Many Talks, No Action)”는 따가운 질책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 얘기가 요즘 다시 나온다. 최근 만난 이창용 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도 그런 지적에 동의한다. 그는 “한국은 토론은 많이 하는데 절충과 타협이 이뤄지지 않아 새로운 개혁을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해야 할 개혁을 스스로 하지 못하면 남의 손에 개혁을 강제로 당하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된다. IMF 관리 체제가 그랬다. 외환보유액을 채우기 위해선 IMF가 내민 개혁 일정표를 따라야 했다. 개혁은 인정사정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흑자 도산과 대량 실업 등 국민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국 경제가 또다시 외환위기를 겪으리라고 보는 이는 많지 않다. 이번엔 ‘다른 위기’를 걱정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답습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다.
어느 사회건 장기 불황이 그저 생길 리 없다. 경제 환경의 변화가 불씨가 된다. 하지만 본질은 다른 데 있다. 불황을 돌파할 구조개혁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사이 국민들의 의욕은 떨어지고 경제는 활력을 잃는다. 일본도 그랬다. 90년대 거품 붕괴 뒤 제대로 된 개혁은 않은 채 단기 부양에만 매달린 게 문제였다.
지난해 한국 경제가 2.6% 성장에 그쳤다는 것은 불길한 징후다. 일본이 걸었던 장기 불황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성장률은 몇 년째 잠재성장률을 밑돌고 있다. 더구나 그 잠재성장률까지 하락하고 있다. IMF도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3%대 초반으로 떨어졌다고 인정한다.
IMF 위기는 청년들에게 옛날이야기가 됐다. 하지만 취업난만큼은 판박이가 되고 있다. 청년 실업자는 열 명 중 한 명꼴이다. 성장이 저하되고, 성장잠재력이 쇠잔해지는 마당에 좋은 일자리가 충분히 생겨날 리 만무하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던지는 메시지는 개혁을 못하면 장기 불황을 맞는다는 것이다. 좋은 반면교사다. 개혁이냐 장기 불황이냐, 한국 사회가 갈림길에 서 있다.
이상렬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