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글래스는 미국에서 전설적인 존재다.
1971년 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리처드 C 사라피언 감독의 ‘황야의 사나이’(원제 Man in the Wilderness)가 제작됐지만, 글래스가 실명으로 등장한 영화는 ‘레버넌트’가 처음이다. 그럴 만도 하다. 한겨울 서부의 가장 험지를 헤매고 다닌 그의 여정을 스크린에 담기 위해서는 막대한 제작 규모와 살인적인 수준의 험난한 촬영이 뒤따라야 했으니까.
이냐리투 감독이 전작 ‘버드맨’보다 먼저 착수한 이 영화를 장장 5년 만에야 완성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2014년 10월 캐나다 앨버타주(州)에서 촬영에 돌입한 첫날, 그는 300여 명의 제작진과 얼어붙은 강둑에 빨간 장미 꽃잎을 흩뿌리는 의식을 거행했다. 현지 원주민들과 함께 촬영지의 대지를 축복하고 제작진의 무사안위를 기원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건 일종의 자축이기도 했다. 감독으로서 오랫동안 꿈꿔 온 작품을 비로소 실현하게 됐으니 말이다.
‘버드맨’에서 번잡한 뉴욕 도심에서 쇠락한 배우의 신경증을 탐구한 그는 ‘레버넌트’에서 야만과 문명이 교차하던 1823년 미국의 거친 산사람들의 세계를 파고들었다. 유럽의 모피 수요가 치솟았던 당시, 비버 가죽 무역으로 미국 경제는 호황기를 맞았다. 경쟁은 점점 치열해져 모피를 두고 사냥꾼들과 원주민 간에 전투가 벌어질 정도였다.
디캐프리오는 “지금도 파푸아뉴기니나 아마존에서는 자본가들이 원주민을 쫓아내고 자원을 착취한다. ‘레버넌트’는 그런 일이 처음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글래스의 아들 등 원주민 역할에는 실제 현지 원주민 배우를 캐스팅했다. 글래스 역을 맡은 디캐프리오와 그의 야비한 원수 피츠제럴드 역의 톰 하디를 비롯한 배우들은 촬영에 앞서 ‘모피 사냥꾼을 위한 신병 훈련’을 받아야 했다.
‘레버넌트’에서 글래스의 여정에 중요한 동력이 되는 뜨거운 부성애는 각색 과정에서 추가한 설정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에서 항상 등장하는 주제다.
혈연 관계에는 가장 원초적인 뭔가가 있다. ‘레버넌트’에서 글래스의 아들은 원주민과 백인 혼혈이다. 19세기는 인종차별이 심했고 노예 제도가 합법이었다. 부자 간의 피부색이 다르다는 건 대단히 복잡한 상황이었다”
‘레버넌트’에서 혈연 관계는 다양한 입장의 인물들을 인간적인 존재로 공감시키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그건 원주민을 무조건 나쁘거나 선량하지 않게, 동등한 존재로 표현하고자 했던 이냐리투 감독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졌다.
이미지로 말하는 영화의 기원에 오마주를 바치고자 했다”는 그는
가장 먼저 지구상에 남은 가장 원시적인 숲을 찾아 헤맸다.
‘버드맨’ ‘그래비티’(2013,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와 다시 의기투합한 이냐리투 감독은 촬영에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시나리오의 시간 순서대로 촬영할 것.
둘째, 당시 시대와 맞지 않는 인공 조명 없이 오직 자연광과 모닥불을 이용할 것.
셋째 ‘버드맨’처럼 매끄러운 롱숏에 도전할 것.
예측 불가능한 야생에서 햇빛이 비치는 낮 시간만 촬영이 허락되는 어려운 상황 탓에 제작 기간이 3개월 이상 늘어났다. 촬영이 늦어지면서 차기작 ‘수어사이드 스쿼드’(8월 개봉 예정,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에서 하차해야 했던 톰 하디와 이냐리투 감독의 불화설이 잠시 돌기도 했다.
예산 역시 두 배로 뛰었다. ‘레버넌트’의 최종 제작비는 1억3500만 달러, 한화로 1580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영화는 시간과 공간과 빛의 예술”이라는 이냐리투 감독의 철학을 꺾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영화가 선사하는 경이로운 풍경은 그만한 가치를 하고도 남는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 같은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굉장한 대자연 속에서 죽기도 하고 치유되기도 한다. 콘크리트로 뒤덮인 사회에서 손바닥 만한 스마트폰 화면에 갇혀 사는 관객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 지구를 다시 느끼기를 바랐다.”
글=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그래픽=최재선 choi.jaeseon@joongang.co.kr 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