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 안 돼, 이상민’.
지난해 12월25일자 중앙일보 스포츠면 기사 제목이다. 이상민(43) 감독이 이끄는 프로농구 서울 삼성은 지난해 12월23일 역대 최다 점수차 패배(54점 차)를 당했다. 당시 삼성은 7승23패 꼴찌였다.
시련 이긴 2년차 감독의 도전
지도자 첫 해 11승 43패 꼴찌 수모
‘모 아니면 도’ 내 성격 아는 서장훈
작년 사퇴하려 할 때 옆에서 위로
그로부터 딱 1년이 흘렀다. 지는 데 익숙했던 삼성이 올 시즌엔 이기는 데 익숙한 팀으로 변모했다. 삼성은 지난 20일 전자랜드를 꺾고 5연승을 달렸다. 삼성의 5연승은 지난 2013년 11월 이후 2년 1개월만이다. 지난 시즌 11승(43패)로 꼴찌에 그쳤던 삼성은 올 시즌 벌써 19승(13패)을 거두면서 공동 3위를 달리고 있다.
이 감독은 인터뷰 요청을 고사했다. “좋은 성적은 선수들 덕분”이라며 “나 대신 김준일(23)과 임동섭(25)을 만나면 안되겠느냐”고 버텼다. 우여곡절 끝에 21일 경기도 용인시 삼성트레이닝센터에서 만난 이 감독은 “지난 시즌은 참 힘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 이후 그렇게 많이 져본 적은 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감독은 또 “감독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감이 엄청났다”면서도 “기자들에게 ‘선수들을 비난하는 대신 날 비난해달라’고 요청했다. 선수들에게는 ‘지더라도 고개 숙이지 말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다독였다”고 밝혔다.
이 감독은 “지난 시즌 연패 후 기자회견장으로 향하면서 사퇴를 결심한 적도 있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놨다. 그러나 연세대 시절 코치 유재학(53) 모비스 감독과 후배 서장훈(41)의 조언이 큰 힘이 됐다. 이 감독은 “지난해 장훈이가 ‘그렉 포포비치(미국프로농구 샌안토니오를 이끌고 5차례 우승을 이끈 명장)가 삼성을 맡아도 힘들 것’이라며 위로해줬다. 장훈이는 ‘모 아니면 도’ 인 내 성격을 잘 안다. 내가 포기하고 그만둘까봐 진심으로 걱정해줬다”고 말했다. 1999-2000시즌 신세계에서 꼴찌를 했지만 모비스에서 프로농구 최다우승(5회) 지도자로 거듭난 유재학 감독은 “누구나 아픔과 함께 성장한다. (이 감독에게) 주위 말에 흔들리지 말고 자신만의 농구를 찾으라는 조언을 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된걸까 고민을 많이 했다. 밑바닥 농구인생을 통해 많이 배웠다”면서 “경기가 끝날 때마다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 더 떨어질 곳이 없으니 다시 도전하는 자세로 임하자고 마음 먹었다”고 밝혔다.
올 시즌 삼성은 지난 시즌 모비스의 우승을 이끈 리카르도 라틀리프(26·미국)와 문태영(37)을 영입했다. 베테랑 가드 주희정(38)도 데려왔다. 이 감독은 “김준일 정도를 제외하면 선수단이 거의 싹 바뀌었다. 창단 후 최대위기 상황에서 선수단 전면 교체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주장 문태영이 선수단 사기 진작을 위해 사비를 털어 돈을 건 뒤 하프라인슛 내기를 한다. 1977년생 주희정은 야간운동을 자청한다. 박훈근·이규섭·양은성 코치도 큰 도움을 준다”고 선수들과 코치들을 칭찬했다.
농구인들은 이 감독이 지도자 2년차에 접어들어 농구를 보는 시각이 넓어졌다고 평가한다. 지난 10일엔 가드 론 하워드(1m88cm) 대신 ‘언더 사이즈 빅맨(신장이 크지 않지만 센터급 선수)’ 에릭 와이즈(1m92cm)로 외국인 선수를 교체했다. 발가락 수술을 딛고 500여일 만에 복귀한 장신 슈터 임동섭(1m98cm)에게 이 감독은 “자신있게 3점슛을 쏘라”고 용기를 북돋아줬다.
이 감독은 “지난 시즌에는 이길 수 있는 경기도 지곤 했는데, 올 시즌엔 어느 팀을 만나도 질 것 같지 않다. 현역 시절 현대에서 조니 맥도웰(1m94cm·미국)과 함께 뛸 때도 10점 넘게 지고 있어도 질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강한 골밑을 가진 팀이 결국 승리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상민은 골밑을 장악한 맥도웰과 콤비 플레이를 펼치며 1997년부터 현대의 정규시즌 3연속 1위를 이끌었다. 올 시즌 라틀리프(1m99cm)와 문태영(1m94cm)의 가세로 제공권이 향상 된 삼성은 팀 리바운드 2위(37.1개)다. 그는 또 “주위에서는 매 경기 접전을 펼치는 삼성 경기가 재미있다고 하지만 정작 난 피가 마른다”면서 “선수들이 날 들었다놨다한다. 눈 밑까지 다크서클이 내려왔다”며 웃었다.
삼성은 지난 17일 무려 1437일 만에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모비스전 23연패에서 탈출했다. 이 감독은 “경기 전 선수들에게 ‘모비스전 23연패는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니 부담감을 갖지 말라’고 했다. 유 감독님이 경기 후 ‘축하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등을 두드려주셨다”며 “모비스전의 묵은 때를 벗어버린 뒤 선수들이 자신감이 더 생겼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삼성 코치 시절 6연승을 해봤다. 주위에서 요즘 상승세라면 삼성도 우승후보라고 말씀하시더라. 일단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뒤 한 발 한 발 올라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감독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서울 라이벌’ SK에 졌다. ‘올해는 다르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이 감독은 “KCC전 작전구상을 해야죠”라고 답했다. 삼성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26일 KCC와 경기를 치른다.
용인=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